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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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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랑과 우정사이"


BY 로미(송민선) 2000-06-06

그와,저녁식사를 한 끼 나누었다고 그 다음부터 각별히 친해진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다음 날 반갑게 웃으며 눈인사를 보내는 나를 외면해 어리둥절하게 했다. 어제의 그가 동일한 사람인가 하는 착각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나는 정말로 서운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제 그는 친절하고,사려깊은 모습을 보여줬다.내게 우정이상의 기대를 갖게도 했다.어쩌면 다른 사람들 처럼 나도 커플이 되는 건 아닐까 설레며 잠들었었다.정말이지 오늘 아침에 이런 식으로 무시 당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시는 아는 척 하나 봐라..'
그 날 이후로,종강 때까지 그도 나도 정말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예민한 내 신경에 거슬리기는 했지만,날이 지나면서 점차 무뎌져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기말고사기간이 다가왔다. 학교 안팎이 어수선해서 시험을 잘 치룰 수 있을 지 의심이 갔지만,어쨌든 난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서,도서관에서 늦도록 책을 들여다 보곤 했다.
그 날, 어느 날 부턴가 강의실에서 멍하니 앉아만 있던 태경이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헤드폰을 귀에 꽂은 채,건성으로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그는 어딘가 몹시 아파보였다. 그런 태경의 모습을 벌써 며칠 째 보아왔지만,감기인가 보다 하고 아는 척 하지 않았는데,옆 자리에 앉고 보니 눈에 띄게 초췌해 보였다.
"어디, 아프니?"
"응!"
기다렸다는 듯 그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래,어디가 아픈데? 감기야?"
"아니,마음이 아파서 그래"
"마음이...아파? 왜?"
"알고 싶어?"
"그래애...무슨 일인데?"
"저녁 먹으러 가자."
태경이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나는 아직 볼 책이 남아 있었던 터라 망설 일 수 밖에 없었다.
"나,먼저 가서 기다릴께.아줌마집알지. 보던 거 끝내고 와"
괜히 물어본 건 아닌지,잠시 후회도 했지만,태경이 사라진 후에 호기심때문에 더 앉아 있을 수 없던 난 자리를 접고,일어섰다.
아줌마집이란,학교 앞에 거의 다 있는 그런 술집이자 밥집이었는데 태경은 순대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너,밥 먹는다더니 술 마셔?"
"넌 안 마시면 되잖아~술도 못마시면서... 밥이나 먹어..."
"근데 무슨 일이야?"
"내 얘기 들어 줄 시간 있어?"
"해봐..들어 줄께. 요즘 니가 아픈 것 같아서,이상하다 그러긴 했어.무슨 일이 있는 거니?"
"애인하고 헤어졌어.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앤데..."
"어,,정말?"
"그래.내가 이러구 있는 동안에,말두 없이."
"참,공분 안하고 연예만 했니?"
가벼웁게 농담한다는 것이 그만 그를 건드린 꼴이 되었다. 갑자기 안색이 변한 그가 화내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야,,니가 뭘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빛처럼 다가온 사랑을 니가 알기나 해?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떠들지 마.알겠어?"
"미안해....그런 뜻은 아니었어...화 내지마"
더듬거리며,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미안해했다. 그가 나가버릴꺼라고 생각했지만,사실 그는 그 날 누군가를 붙들고 하소연하려고 벼르던 참이어서 곧 태도를 바꾸어 다시 얘기를 했다.
그가 사랑했다는 여자얘기를 할 때는,눈에서 빛이 반짝거리는 것도 같았고,그 여자와 헤어지게 된 얘기,그 여자에게 잘 못해줘서 가슴 아팠던 얘길 할 때는 세상이 무너져 보이는 것 같았다.술 때문에 감정이 과장 되어진 탓도 있겠지만, 난 남자도 그렇게 사랑을 한다는 걸 첨 알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빛처럼 다가온 사랑이란 말이 몹시 맘에 걸렸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라고 태경에게 얘기하고 싶기도 했다.
어줍잖은 위로를 마치고 태경과 나란히 버스를 타러 갔다. 태경은 몹시 고마워하면서,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고...고맙다고 말을 했다.
그 날 이후,태경과 나는 몹시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같이 다니던 현애나 유정 진희까지도 혹시 태경과 내가 사귀는 사이가 아닌가 의심했지만,태경과의 사이는 그런 건 아니었다. 어린 맘에도 엄마처럼 어쩐지 태경을 살펴줘야 할 것같은 맘이었고,태경도 엄마 찾 듯 캠퍼스 어디서든 나를 찾아 다녔다.
둘이서 밥먹고,공부하고,집에 가러 나란히 나서고...하지만,다른 사랑하는 커플들과 다른 게 태경과 나였다. 태경은 틈틈이 헤어진 애인 땜에 슬퍼하고 있었고,난 틈나는 대로 그를 위로했다. 사이좋은 오누이 같다고나 할까.
학기말 고사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종강파티를 한다고 저녁 늦게 까지 모임이 있던 그 날,일 이차를 마치고 몇명 남은 사람들끼리 다시 학교 안으로 자리를 잡아 삼차를 시작했다. 그 사이 태경때문에 몇 몇 남학생들과도 친분이 생겼고,나와 같이 다니던 여자애들도 그들과 친해진 덕분에 유쾌한 술자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운명은 그렇게 잠잠하게 나를 내 버려둔 건 아니었다. 잠시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다니러 갔던 난 그 앞에서 성진과 마주쳤다.한 번도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던 터라 어째야 좋을 지 알 수 없었지만,얼굴을 찌푸린 채 가벼운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는 날 손목을 나꿔 채서 끌 고 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너무 놀란 나머지 앗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딸려갔다. 열려 있는 한 강의실로 간 그는 팽개치듯 손목을 놓으면서 오히려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너,왜 신경을 거슬리는 거야?"
"뭐라구?"
너무 어이가 없어진 나는 무시하고 나가버리려 했다. 어깨를 잡아 챈 그는 벽에다 붙여 세우면서 바싹 다가왔다.술 냄새가 났지만 그보다 겁이 더 났다. 하지만 침착해지려 애를 썼다.
"왜이러는 건데?"
"태경이랑 무슨 사이야?"
"니가 그걸 왜 물어?"
"넌,그러면 안되지."
"무슨 돼 먹지 않은 소리야?"
갑자기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나에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던 걸까. 그가 아는 척 한 번 안하던 그 동안 그 만큼이나 서운해하고 있던 걸까. 그 만큼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너무나 혼란스럽고,그런데도 그가 밉지않은 내가 싫었다.
"너,까불지마.넌 내꺼야."
"뭐?뭐라구?"
"못들었어? 넌 내꺼라구,니가 항상 내 앞에서 맴 돈다는 걸 내가 모른 줄 알아? 하지만,한 과안에서 소문나는 건 안돼,알아?이 바보야!"
"......."
"태경이하구 붙어다니지마.알겠어?"
어설프게나마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다.뭐라고 한 마디라도...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훗날에 내 친구들은 물었다. 어째서 성진에게만은 항상 그렇게 바보같이 끌려만 다녔냐고.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잘난 척 똑똑한 척 하면서 그에겐 언제나 왜 그렇게 끌려만 다녔느냐고.
할 말이 없다.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때 내가 왜 그?O는지 아직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조건없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던 20살 초반에 나에게,그건 빛처럼 다가온 사랑일 뿐이었다고 ....그?O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