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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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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사라 2000-05-31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외곽의 이 변두리로 흘러들어온 이유는 남편의 부도 때문이었다.

넌덜머리 나는 채권자들로부터 도망치듯이 숨어들어 온 곳이 바로 이 동네였다.

낡은 연립주택 네 동과 그 주변을 감싸듯이 둘러싸고 있는 널찍널찍한 파밭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된 것은 창문을 열면 확트인 시야와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아싸한 파향이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즈넉함과 대지 위로 나른하게 떨어지는 정오의 햇살.

동네는 지극히 평화로운 외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면 위의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추하게 발을 종종거리듯,

이 마을의 위장된 평화 속에는 거대한 부조리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그 부조리의 중심축에 동구선생이 있었다.

이사온지 한달 무렵, 나는 반장이라는 그 동구선생과 통화를 할 일이 생겼다.

우편함에 꽂힌 한 장의 내역서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반비라는 명목으로 걷힌 백만원이 넘는 총액과 지출내역이 그다지 일목요연하지 않게 적혀 있었다.

지출사항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마대자루 두어개와 종량제 쓰레기 봉투 몇 개 뿐이었다.

백만원 가까운 금액이 고스란이 잔액으로 남아 있었고,

요는 그러고도 또 반비를 내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이 황당함과 부당함에 항의하고자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수화기 저편의 늙수그레한 목소리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올테면 오라는 듯 짐짓 전의적인 목소리로 대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매달 오천원씩이나 반비를 걷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시골에는 당연히 리세라는 게 있고, 또 공동비치금 같은 거라고 했다.

동구선생은 마치 자기가 이장이나 되는 양 권위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느 누구 하나 계단의 전구 하나 갈아넣지 않아 이사오던 날부터

어두컴컴한 계단을 더듬거리며 오르내렸건만 공동을 위한 비용이라니....

백만원이나 되는 누적금액에 대해서, 그러면 이사갈 때 나눠서 돌려주느냐고 물었다.

동구선생의 반응은 한마디로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반비를 낼 수 없다고 공언했다.

서울에서 처럼 그때그때 필요한 사항이 생기면 10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세대수로 나누어서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구선생은 젊은 년이 무례하다는 욕지거리와 함께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명언을 남기며 철커덕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백만원이라는 거금이 개인금고에서 수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찜찜했으나,

결국은 분배되지 않을 그 돈의 미래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깡마른 왜소한 체구에 매우 신경질적인 얼굴의 동구선생은 알고보니 이 동네의 토박이도 아니었다.

불과 몇년 전에 나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이었고, 전직 교장선생 출신이라고 했으나

그것 역시 본인 입에서 흘러나온 확인되지 않은 신분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동네사람들의 태도였다.

총 50세대의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어느 누구하나 동구선생을 거스르는 이가 없었다.

말 잘듣는 착한 아이처럼, 사이비 교주의 광신도들처럼, 폭력조직 보스의 충직한 심복들 처럼,

그렇게 서로 입을 맞춘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