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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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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BY 유수진 2000-06-12

" 후련하다.....
야! 내일 모래면, 졸업식인데, 나한테 뭐 없냐? "

오늘도, 한바탕 여지없이 회호리가 지나간 후,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침대밑의 팬티를 천천히 발에 하나씩 끼며, 하현수가 말했다.

졸업......

아........

이제 졸업 시즌이구나.

진재오빠두....



예정대로라면,
이맘때쯤, 그와 함께 비행기를 탔을텐데.....

담배를 피워물고,
스케치북과 연필을 내앞에 들이밀며, 하현수가 말했다.

" 나, 그려줘!
졸업 선물로..... "

그리고는, 맞은편 소파로 가서, 입에문 담배 한개비를 '쭉욱 쭉'
빨아대고는 재털이에 비벼껐다.

" 야....
이렇게 하면돼?
그냥 이렇게 앉아 있으면 되는거지? "

난, 팬티만 걸친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를 멍하게 쳐다봤다.

" 뭐해?
안그려줄꺼야? "

" ......................................
넌............
지치지도 않니? "

그는 잠깐 놀라는거 같더니, 이내 그 능글스런 웃음으로 대꾸했다.

" 흐흐흐흐흐흐.......
너 모르는구나!
내 목표가 100명이라는거....
그 목표 다 채우려고, 산삼 녹용에다, 사슴피까지...
안 먹은게 없을 정도다.
지칠수가 없지.
오우- 해인이가 그래도 내 테크닉과 정력을 알아주는데.....
역시........
천연기념물이 좋긴 좋아... 느낌이...
으~
요놈의 주둥아리.... 미안, 미안, 흐흐흐흐흐흐흐....... "

난 침대맡에 비스듬히 누워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서 곧바로 내게 달려왔다.
정말, 지치지도 않았다.

" 야! 이해인.
우리끼리니까 말인데....

니 얼굴에 경진이 다리만 붙여놓으면, 끝내줄텐데....
너의 그 신비한 이미지, 묘한 매력이 아깝단 말야.

잔뜩 겁먹은 듯한 큰 눈망울에, 작고 도톰한 입술...

같은 형젠데, 극과 극이야.
경진이는 선이 날카롭고 가느다란데, 해인이 넌.....
으아~야.......... 농담이야, 농담....

화났냐.... 암말 안할께....

기집애..... 째려보기는..... 잡아먹겠다, 야........ "

건성으로 움직이는 내 손.

형체를 알 수 없는 선들.....

이건........

옛날 그 혹독한 추위속에 죽였던 짐승.......

이번엔 암컷이었다.





" 아이구우~ 얼마나 듬직하던지......
난 이제 고생 끝났어.
울 아들 판검사만 되면......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정말, 실실 웃음만 나오는게......

냉이국 더 줄까?

내 사진 나오면 뵈줄께.
사각모자, 그 뭐시냐.... 암튼 울 아들 모자 턱 뺏어 쓰고 찍는 그 기분이란...... "

먹히지 않는 아침겸 점심을, 아줌마 성의 때문에 마주 앉아
깨적거리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먹을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부터 으슬 으슬 추운게 머리까지 천근만근.

만사가 다 귀찮았다.

식은땀 흘리는 내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었지만.....

" 아유~
우리 근호가 뭐시냐, 그 씨....씨.....
아 맞아! 씨씨라는 아가씨를 턱 데리고 나오잖아.
공부 못했으면, 혼낼려고 했는데, 근데.....

해인이....
어디 아퍼? "

머리가 식탁위에 거의 고꾸라졌다.

" 아유, 아유~ 이 열좀봐!
아니, 아이구 그래서 그렇게 밥 못먹고 있었구나.

아이구, 나두 주책이지.
해인이 아픈것도 모르고, 주절 주절 떠들고 있었네.

감기 몸살이구나.

환절기라 그런거야.

자,자~

이리와,
침대에 좀 누워.

내 얼른 약 지어 올께.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 "

아줌마의 말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가 싶더니,

수천마리의 말떼들이 내게로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 히히히히히힝~~~~~~ 히히힝~~~~....... "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 '

말떼들로 부터 도망치던 난 그대로 엎어져,

무서운 말발굽에 온몸을 ?기고, 밟히고...

날카로운 쇳굽이 내 온몸을 고통속에 밀어 넣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악-,살려줘! "

난 몸부림을 쳤다.

살려줘!

오........빠......

진재오빠..........

말떼들이 몰고온 암흑속에서 정신없이 허우적 거렸다.

나.......
한번만.......
한번만........진재오빠.....
진재오빠.....보고......

보고.......

칠흙같은 암흑속에서 선이 굵은, 반듯한 검은말 한마리가
선명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눈부신 갈기는 번쩍 번쩍 빛이 났다.

' 살려줘... '

난 눈빛으로 애원을했다.

빛나는 흑마는 주둥이로 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다시 평온을 찾은 나.....

".......인......."

"........아........"

" 해인....."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희미한 소리......

..........내 이름..........?

해인..............?

" 해인아.........."

흑마가...........
나의 이름을...........

" 해인아.......... "

" 해인아, 정신차려! "

'해인아, 정신차려!'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

눈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빛나는 흑마의 형상이 보이는가 싶더니,
그 위로 진재오빠의 얼굴이 겹쳐졌다.

난,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만질 수 없는 진재오빠의 환상은 싫어!
책임감없이, 그리움만 남겨두는 그런 허상은 지긋지긋해!

" 해인아.... 해인아...... "

다시한번 또렷하게 들리는 내이름.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진재오빠...........?

" 해인아....
정신이 좀 드니? "

난, 눈에 힘을 주고, 사력을 다해 눈앞의 진재오빠를 쫓았다.

낯익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

" 진재 오빠..... ? "

" 해인아,
이녀석.. "

" 진재오빠....... 맞아요? "

" 그래,
나야......
많이 아프니? "

" 난........
진재오빠..... "

" 말 많이 하지마.
해빈아, 전화.....
아니, 해인이 업혀줘. "

해빈이....?

해빈오빠......

난, 흔들리는 머리를 가까스로 두리번 거리면, 해빈오빠를 찾았다.

묵직한 통증.......

" 해인아!
움직이지마!
너 지금 많이 아파...... "


" 아니, 아줌마.....
어떻게 된거에요.
얘가 왜 여기 있는거에요? "

" 아니......저.........
사촌동생이라 그러길레..... "

" 아휴~
이게 도데체 무슨 일이야....
현수 이새끼를 그냥.......
해빈아.....
유림이....
아니, 느이 엄마한테 얘기했니? 얘기하고 온거야? "

내몸을 일으키는 크고, 단단한 낯선 손길의 주인공은 해빈오빠였다.

기력을 잃은 내 눈빛을 쳐다보는 형제의 눈빛에,
알수없는 회호리가 지나갔다.

진재오빠의 따스한 체온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마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기분으로 그의 몸을 힘주어 끌어 않았다.
꿈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 해빈아.....
유림이 한테 어떻게 말할거니..... ? "

"............................
있는 그대로요....
달리, 어떻게 말할수 있겠어요. "

" 아휴~
아줌마....
현수 이새끼 어디 갔어요? "

" 저...
글쎄요.
졸업식날 부터 안보이던데.....
어디, 놀러갔겠지요. "

" 아휴~ 속상해서 정말.....

해인아......
너도 그렇지. 아니, 어떻게 여기 와 숨어있을 생각을 했어.
간도 크게.....

늬들.....

아무일도 없었던 거지?

아니, 이봐요!
걔 어디로 데려갈려구 그래요?
설마, 그꼴로, 평창동 집에 데리고 갈 생각은 아니죠? "

" 병원으로 갈겁니다. "

" 응~
그럼, 따라와요.
차로 바래다 줄께. "

" 아니에요. 제차로 가죠.
그럼 이만, 급해서요.
해빈아, 가자! "

" 해빈아,
넌 나하고 얘기좀 하고 가..... "

" 아줌마.....
현수 오면, 저한테 전화 넣으라고 하세요. "

" 아니......
야! 이녀석아.....
뭘 어떻게 할건지 얘기를 하고 가야할거 아냐.....

그리고, 현수가 무슨 죄인이니?
해인이가 부탁해서 거절하기 불쌍하니까, 여기 데려다 놨는가 본데....
왜들 그렇게 딱딱 거리고 난리들이야...... "

인정 아줌마의 높은 언성을 뒤로 한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포근히 기대있는 내 등뒤로 따뜻한 점퍼가 둘러졌다.

힘겹게 눈을 떴는데,
해빈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온몸의 기를 모아 입술에 담았다.

" 오빠.... "

" 응...... "
" 응! "

해빈오빠와 진재오빠 둘다 대답한다.

" 해빈 오빠.. "

" 응......? "

" 나...... 여기...... 어떻게..... ? "

" 미영씨가....... "

" .....................
응...........그랬......... "

해빈오빠와의 첫대화.....

이런식의 대화를 원했던게 아니였는데....
이런 상황속에서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게 아니었는데.....

해빈오빠와의 첫 대화는.....

사춘기의 고민을 털어내고,
이마에 난 여드름과 남학생들에 대한 호기심같은거 물어보고,
......적어도 그렇게 평범한 오누이간의,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원했던건데.....

진재오빠의 품속에서,
길었던 긴장속의 여장을 풀고,
실로 오랜만에 꿈같은 휴식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꿈같은 휴식속으로.....

어쩌면,
깨어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꿈같은............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