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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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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BY 유수진 2000-04-28

화형!

나의 몸이 불기둥이 되어 산화 되고 있다.

나의 눈속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잉태시키며....

인부들의 아무 거리낌없이 분주한 손놀림이 나의 몸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뿌리채 뽑아대고......

"이 나무 그냥 이자리에 심어요?"

늙은 인부의 거칠게 질러대는 소리에 현관 근처에 있을 엄마의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냥 그자리에 심으세요."

이름모를 앙상한 나무 한그루가 화니가 있던 구덩이에 쑥- 들어가 덩그러니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진재오빠의 편지와 사진들 나의 화니 상자가 타들어가는 연기속으로...........

'일생 한번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거야.
니가 사랑할뻔한 남자를 비롯해 너의 가족들을 위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해라.
거기서 인연 만들어 오면, 멋지게 식 올려줄테니까....
알아들었지. 엄마말......'

'진재 그놈이 어려서 지 엄마 여의고, 형 다리노릇까지 다한 놈인데....
남은 인생을 또 넘 다리노릇을 하며 보내야 한다니....
그놈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자꾸만, 자꾸만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조여오는 목소리들.....

트럭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진 나의 화니가 몸뚱아리의 반을 트럭 뒷꽁무니에 빼꼼히 내민체 나를 올려다 보고 있다.

내 분신들의 형체가 검은 재로 남을 즈음 인부들은 화니 자리에 그 앙상한 나무를 달랑 심어놓고, 트럭에 올랐다.

멀어지는 화니

그 모습 뒤로 경진이 천천히 모습을 보였다.

난 그녀의 출현에도 아랑곳없이, 화니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그곳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끈질긴 시선을 느꼈다.

경진은 내가 쳐다봤던 곳을 한번 흘깃 보더니,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관리를 마무리했다.

의미심장한 눈빛의 비웃음.

나도,
따라 웃었다.

이글 이글거리는 불기둥을 눈에 담고...

놀라는 경진을 뒤로한체, 휠체어를 돌렸다.

15분전, 10시!

경진은 과목 몇개를 빼먹은 늦은 강의를 들으러 갈테고,
엄마는 세미나 참석차 외출을 할 것이다.
엄마가 외출하는 날이면, 언제나 집을 비우는 아줌마도 한껏 멋을 부리고 늦은 외출을 할것이고.....



오후 12시 30분경.

그는 30분 일찍 왔다.

빙글 빙글 웃으며 들어오는 그를 굳은 표정으로 맞이했다.

"오빠, 기다렸지! 그럴줄 알고, 강의도 빼먹고 부랴 부랴 왔지."

"문, 닫지마!"

멈칫하는 그에게 다시 차갑게 말했다.

"조금있다, 미영언니 올거니까, 허튼짓 할 생각 하지마!"

"야아~ 해인인 오랜만에 오빠보고 입 연다는게, '하지마' 투성이냐!"

차갑게 올려다 보는 내게 그는 예의 그 능글스런 웃음으로 대꾸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냥 여기서 들으면 되지?!"

하며, 노란색 파카를 벗어 침대에 휙 던지더니, 내앞을 가로질러 그대로 '벌렁' 반쯤 드러누웠다.

찌푸린 내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주절댔다.

"우리 나비공주가 어인 일로 소인을 다 부르셨는지....
그것도 사람 하나없는 나비공주 처소로...."

순간, '후회'의 감정이 확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달리, 다른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날 이집에서 빼내줄 사람은 저 능글스런 하현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겐.....

난 입을 여는 그 순간까지 후회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도움 줄수 있다고 했지!
도움이 필요해!"

놀란듯 상체를 일으키는 그에게 다그쳐 말했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대답해줘.
도움 줄수 있어? 없어?"

하현수는 입을 벌린체 멍하게 쳐다보던 표정을
능글스런 미소로 바꾸며 말했다.

"야! 넌 도움 줄놈처럼 말하냐.
도움이 필요하다는 놈이 더 땍땍거려."

그는,꼿꼿한 자세로 경계하고 있는 내쪽으로 천천히 일어나 걸어왔다.

잔뜩 긴장된 내 손이 반사적으로 휠체어 바퀴위에 올라갔다.

그는 내 앞에 놓인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떤 종류야?"

"................?"

"예를 들어, 금전? 아니면, 하룻밤 상대냐, 그말이야."

난, 다시 예전의 경멸스런 눈빛이 되었다.

"하하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나비공주님 앞에선 농담도 못해!
어렸을땐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더니....
무서워서, 니 근처도 못가겠다.
...........그게...........아마.........
다리 그렇게 되고 난 후부터였지.............?"

"간단히 말하겠어!
이번 일요일 우리집 식구들 성당에 간 다음,
그러니까, 10시 부터 11시 반.....
그 사이에 나 이집에서 빼내줘!"

능글스런 미소는 사라지고, 거의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에 적응할동안만, 있을.....
아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한 세달? 네달?..............
은신처도 마련해 줬음 좋겠어........

물론, 이 모든건 우리집 식구는 물론이구, 경진이도 몰라야 해!
인정 아줌마도 알면 안돼! 아저씨도....."

그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좋아!
이웃집 오빠로서.......
그리구, 현수는 한번 한 약속은 지킨다........
그런데.....
넌,
내게 뭘 해줄건데.......?
가는게 있으면, 댓가가 있어야지!"

난 이미, 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뭘 원하는데.....
지금 이런 상태의 나한테......
기다려만 준다면,
성공해서 반드시 갚겠어!"

굳게 다짐하는 나를 쳐다보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성질이 급해서 기다리는건 딱 질색이야.
나중에 내가 원하는걸로 갚아!"

"뭘 원하는데...."

"그건....
이 일이 다 끝난후에 말할께."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걸 눈치빠른 그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저지르고 나니,
차라이 속이 편했다. 생각보다 담담한 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 입구를 쳐다보는 나보다, 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가는 하현수.



"어!

안녕---- 누나!
우와~~~~ 여전하네. 누난......."

"........................................"

대꾸가 없자 하현수는 머쓱한듯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해인아-----
나중에 보자! 해인이.......공부 열심히 하죠.
하하.
성질이 좀 터프해서 누나가 고생이 많았을거야.
근데, 참 대단하세요. 저런 별종을 2년넘게....
2년이 뭐야, 거의 3년 다돼가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

"그럼, 나 진짜 간다............."



난,

휠체어를 돌려 창가로 갔다.

잠시후, 허둥지둥 되돌아 와서는 침대에 놓인 노란 파카를 들고 나가는 하현수의 분주한 인기척이 느껴지고......

미영이 소리없이 들어와 초록색 하프코트를 옷걸이에 거는 기척이 들렸다.


정원의,
내 분신들의 검은 흔적이

내 마음까지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