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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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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BY 유수진 2000-03-17

"군 3년동안 한 여자를 알게됐어.
그녀는 잠자는 시간외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지.
어느, 추운 겨울밤 새벽녘까지 보초를 설때에도 나와 함께 있었어."

뒤뜰에, 초록잎이 절정에 이른 화니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앉아있던 내게 다가와, 그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불쑥 뜬금없는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난 내 허벅지에 걸쳐있던 망토를 가다듬어 내 하체를 완전히 가렸다.
그리곤, 갑자기 내 사색의 상념속에 무례하게 불쑥 끼어들어 음흉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김진재를 하현수 쳐다볼때의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내 경멸의 시선에도 김진재의 나를 쳐다보는 그윽한 눈빛은 내눈을 빨아들일듯 까딱하지 않았다.

"음담패설은 경진이한테나 하시죠. 더러운..........."

악담을 하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처음이고, 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만 마주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굵은 바리톤 음성과, 게다가 나를 쳐다보는 저 이상한 눈빛에.....

상막하고, 회호리만 불어치던 벌판에 갑자기 쏟아지는 해의빛같은 눈을 하구선.....

휠체어를 휙 돌렸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싶지 않니?"

난 이미 돌려진 휠체어에 그가 서있는 쪽으로 머리만 신경질적으로 돌려서 매몰차게 쏘아부쳤다.

"댁의 여자를 내가 알게 뭐에요!"

그리곤 휠체어를 힘주어 굴렸다.
얼마나 쎄게 굴렸는지 저절로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잇-!"

"이 해인!
바로 너야!"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난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을 때리는듯한 저 소린.....

그는.....

김진재는 내가 미동도 하지않고 있는 그 긴 시간을 끈기있게 기다려 주고 있었다.

난 천천히 그를 돌아보고 입을 뗐다.

"지금 댁이 한 말은 정상인 약올리는거 보다 더 잔인하다는거 아세요.
병신 약올리면......................"

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분노, 슬픔, 이런 감정들이 섞여 주르륵 내 볼을 적시고, 이내 찝찔한 맛이 느껴졌다.

"이런, 이런!
해인이 약올리려고 한말, 절대 아니야."

김진재는 내 휠체어쪽으로 황급히 다가와 돌부리에 '털썩' 걸터 앉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분노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는 나를 잠시 올려다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

"해빈이는 언제나 네 얘기를 했었지.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하는 동생의 다리를 빼앗고, 가족들로부터 격리시켜버린 자신의 죄책감에 괴로워했어,

해빈이는 3년 내내 하루도 해인이 너의 얘기를 안하고 넘어간날이 없었어."

김진재는 알아달라는듯이 호소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2년이 좀 넘은 후부턴 내가 얘기해달라고 졸랐으니까.....
군생활에서 여자얘기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든. "

그는 빙긋이 웃으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게 애인 얘기건, 쫄따구 여동생 이야기건간에.....
심지어, 누나 이야기까지 군인들사이에선 대단한 흥미꺼리지.
해빈이녀석, 군복 윗주머니에 끼워져있는 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술마실 기회만 있으면, 너의 이름을 부르며 취했어.
해빈이가 지니고 있던 해인이의 사진은 해맑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었지.

1년은 해빈이녀석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또, 1년은 해인이 너에 대한 동정심으로 보냈고,
나머지 1년은, 너희 둘에 대한 연민과, 불현듯 너무 많은것을 알아버려서, 마치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헤어져 있는듯 그리운 사람이 되어버린 해인이와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난,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내게 이런일이......
저사람이 말하는게 정말 진실인지......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 내 시선에,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내 느낌을 너에게 전하고 싶었어.
4년동안 짝사랑하는듯한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식은땀이 났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만약 정상인이었다면, 어쩌면, 그 짝사랑이 영원한 짝사랑으로 끝났겠죠.
내다리가 이모양이니까, 죽이돼든 밥이돼든 한번 던져나보자는거 아니에요."

그는 약간 놀란듯한 표정으로 손에 잡고 있던 풀뿌리를 살며시 바닥에 털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굵은 바리톤 음성으로 말했다.

"생각보다 많이 꼬여있구나."

"확인하고 싶었어.
막연한 내 이 감정을.....
1년전 이집 대문앞에서 사랑이라는걸, 사랑이란 느낌이 확실하다는걸 확인했지.

해인이 주위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는거 이제, 지쳤어.
난 해인이 4년을 알았어.

해인이에게 나와 같은 감정이 되달라고 하는건 아니야.
단지, 너에게 내마음을 전하고 싶었던거지."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한체 중얼거렸다.

"댁의 마음을 알았다고해서 이 상황이 변하진 않아요."

그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할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경빈이었다.

"안녕하세요. 진재형."

"어, 경빈이구나. 학교갔다 오는길이니."

"네."

"하하...
해인이 보디가드.
내가 누나 어떻게 할까봐 나타나신건가."

"아... 아니에요.
그냥 말소리가 나길레....."

경빈이는 예의 그 천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이제 좀 괜찮은거야?"

난 휠체어를 뒤뜰 깊숙한 곳으로 몰았다.
내 모습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저 둘이 안보이는곳으로 숨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후,
내 표정은 많이 밝아졌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고, 아직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가 방문하는 날만을 기다리며, 분에 넘치는 행복에 겨워 지냈다.

더이상 식구들의 기분에 거스르지 않는 옛날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그 말에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김진재는 경빈이를 통해서, 물감 한셋트와 눈처럼 흰 파레트, 그리고 붓 셋트를 보내왔다.
난 그 선물을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이것들로 그림을 그리면, 모든것이 일순간에 날아가버릴것같은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의 말소리에 가슴두근거리고, 먼발치에서만 그를 쳐다봐야 하는 안타까움이 더욱 나를 사랑의 감정으로 치닫게 했다.
하지만, 선뜻 받아들일수도 없었다.
받아들인 후엔?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 이런 모습으로 뭘 ...... 도데체..... 뭘 어떻게.......

미영과의 서먹한 시간을 마치고 난 거실로 황급히 나왔다.

지금 밑에는 그가 와있다.
그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냥 거실 입구에 몸을 숨긴체 언뜻 언뜻 보이는 그를 숨죽이며 보는거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한테 시간 너무 뺏기시는거 아니에요."

"흐흥.... 난 젊은 사람들하고 대화하는걸 그림그리는거 보다 더 좋아해.
막 젊어지는 기분이거든........"

"사진 몇장만 찍겠습니다. 자아~ 너희들 다 이리나와라."

"우리들도 같이 찍으면 더 보기좋지 않을까."

"야! 빨리 그 시커먼 얼굴들 치워라.
사진 버릴라."

"호호호호........ 그래요. 학생들하고 같이 찍으면, 더 자연스러울거 같은데...
어차피, 그 학교 신문에 나가는거 아니에요. 굳 아이디어야."

"하하하하하하..... 화백님께서 그러시니, 같이 한컷 찍고, 화백님 독사진 몇장하고......
아! 가족사진도 한컷 찍죠.
회장님께서는 사진찍기 힘드시니까, 음..... 집에 해빈이, 경빈이 밖에 없죠. 어쩐다....
가족사진은 조금있다 찍죠. 뭐..."

"자아~ 다시 모여봐.
화백님을 중심으로.........그래. 중석이 그쪽에 앉고.....
야! 이해빈! 넌 빠져. 우리학교 학생 아니잖아."

"야! 너희들 너무하는거 아냐.
우리 엄만데.... 아들을 빼다니......"

"그러니까, 있다 가족사진에 넣어준다잖아"

"아이고마~
가족사진이라카믄, 지도 끼워 주능교."

"하하하하하......
그럼요. 아줌마. 아줌마는 있다가 독사진 3장 찍어 드릴께요."

"아이고마~ 고맙심더. 사진 안찍은지 10년도 더 됐는데....
울 딸래미한테 보내줘야되겠꾸마. 고맙심더....."

'찰칵! 찰칵!....... 찰칵!.........찰칵! ..............'
프레시의 번쩍거림에 사진 찍는 소리..... 화기애애한 풍경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타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갱진학상이네.
요새, 와이리 성적이 좋노.
해가 중천에 떳는데..... 일찍 일찍 들어온다~"

잠시후,
경진이 뛰어들어오며, 아줌마에게 눈을 흘기며 말한다.

"어머~
아줌만 제가 언제는 일찍 안들어왔어요.
세삼스럽게....... 노망나셨나봐."

째려보는 경진의 눈길에 아줌마는
"아이구마~ 내 정신좀 보래이~
커피물 올려놓는다는걸 깜빡했네.
갱진학상 시장하지.
내 얼른 커피타고, 밥 차려주꾸마"
하며, 허둥지둥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이~ 안녕하세요.
마침 사진찍는 중이었는데....
경진씨 독사진 하나 제가 가져도 돼죠."

경진은 활짝 웃으며, 다시 코맹맹이 소리가 됐다.

"어머나~ 오셨어요.
호호호호호.......그럼요. 나중에 스타되고나면, 없어서 못팔텐데요..후후.."

"자아~ 오세요, 오세요. 가족들 다 모이셨는데....."

"경진씨, 이쪽입니다. 어머니 옆에 앉으세요. 경빈이랑, 해빈이는 뒤에 서고... 자.........자......."

"잠깐!"

김진재의 외마디 소리에 모두들 그를 쳐다봤다.

"해빈아~
해인이도 내려오라고 그러지."

김진재의 말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주먹을 꽉 지어보았지만, 떨림은 멈추질 않았다.

"진재 학생.
지금 누구라고 했지?"

엄마의 목소리는 아까까지의 밝은 목소리에서 얼음짱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네,
해인이요.
아까, 가정교사 다녀간걸로 알고 있는데,
2층에 있죠?"

그는 어쩌자고.....
도데체 어쩌자고 저러는 것일까.
난 있는힘껏 목을 빼서 엄마의 안색을 살폈다.
엄마도 나만큼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해인이.....
그 애는......"

"아~
아까, 그 아가씨가 가정교사였어?
해인이?
이해빈! 동생이 또 있었냐????"

"야아~
몇달을 들락거렸는데....
얼마나 이뻤으면 우리 늑대들앞에 내놓지도 않고 꼭꼭 숨겨놨냐."

'쿵쾅, 쿵쾅, 쿵쾅,........'

갑자기 누군가 후다닥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휠체어를 재빨리 반대방향으로 튼다는게 당황해서, 정면 계단쪽으로 몰았다.

'끼익~'
'덜컹 덜컹 덜컹.....'

"앗!"
하는 사이에 경진이와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들이받고, 육중한 휠체어와 함께 계단을 굴렀다.

'쿠당탕탕탕탕쿵!쿵!쿵......' "아아아아악~!" "으아아악!"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