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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칠순여행을 다녀와서


BY 가을단풍 2024-01-26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회 주관으로 베트남 다낭으로
고희(70세)을 기념하기 위한 여행을 다녀 왔다.
딸아이 변호사 시험을 망친 직후라서 마음이 너무 힘들고
아이의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내키지 않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어쩔수 없이 끌려간 베트남 다낭 여행이, 그들의 칠순을 기념하기 위한 여행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남편 친구들의 여행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여러가지 사정이 좋지 않을 때의 부부 동반 여행은 참으로 고독하며 마음에서 쌩- 하니
찬바람이 일게 마련이다.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힘들어하고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팔자 타령을 했기 때문이다.
딸은 남편을 닮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힘들면 감정을 마구 마구 뿌려 대서 주의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재주
가 뛰어 난 지라 나에게 더 많은 짐이 가중 되어 간다.
그러나 나이가 먹은 만큼 먹었는데 이미 약속된 여행을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하여 깰 수 없어서 그냥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남편의 고향에서 모두 버스를 탑승하고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36명의 모든 일생을 만나게 되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서로  나이 차이가 상당이 났다.
특히 신체 나이는 엄청 심하게 느껴졌다.
어떤 분은 이가 다 빠져서 합죽 거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허리가 틀어져 구부러진 사람도 있었다.
본시 초등학교 동창들은 같은 동기 안에서도 3살이 더 많은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 나 같은 사람은 남편보다 5살이 적으니 8년 정도 차이가 나다 보니
더  차이가 났다.
나는 몸이 건강하고 다부지고 젊고 세련된 사람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더 눈에 띠었다.
에구 에구 내 케리어에 그들의 짐을 나누어 담게 되는 상황도 생겨났다.
허리가 구부러진 동창이 작은 케리어를 들고 와서 어쩔 줄을 몰라 했기 때문이다.
"그래 - 침울한 여행에 좋은 일이라도 하자."
그들은 동창회를 하면서 오랫동안 만나왔으며 늘 함께 했기 때문에 친밀도가 높아서
잔치 분위기가 났다.
깔깔 대는 그들의 웃음 뒤에 숨어있는 나는 내 가슴에서 진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 귓가에 "나 뭐해 먹고 살어"하며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편의 뚱한 표정에 나는 더 지쳐버렸다.
잔치 분위기 속에서의 우울은, 마치 진흙속을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투숙하여 서로 등을 돌리고 먼저 코를 고는 시흉을 했다.
아침 식사는 남편 혼자 하였다.
나는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 어젯밤 영흥사 관람을 했던 사진을 보았다.
우리 부부의 표정이 다른 사람들 사진까지 망쳐 놓은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우울하게 마블마운틴 ,투본강 투어를 하며, 호이안으로 들어가 도자기 마을
투어를 마치고 베트남 한강에서 야경 투어를 했다.
화려한 영상 속에 눈물을 감추는 것 아주 쉬웠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할 때 남편은 술 꾼 속에 붙어 만취를 하며 놀고
나는 지인들과 적당히 섞여 논다.
남편과 여행을 자주 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여행을 하게되면,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듯이
술을 좋아하는 그는 향상 술 여행을 하고 나는 늘 그 뒤를 따라 다녔다.
남편의 친구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 댁 부부는 왜 밥도 같이 안 먹고 따로 따로 다녀요?"하고 물었다.
"원래 그래요,"하고 말했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웃음을 남겼다.
그옆에는 예쁘고 단정한 그의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곰곰히 나는 생각했다.
우리 부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뭐가 문제인가.
하나씩 문제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 많아서 다 적을수가 없었다.
대 가족속에서의 억울한 시집살이와
지금도 여전히 자기 동생들의 어미 노릇을 해주기를 원하는 시댁 형제과
술 꾼 남편 늦은 귀가 속에서 잭깍 거리는 시계 소리에 구슬피 울며 지내던 내 삶과
다리가 불편한 딸아이 방학만 되면 수술하고 퇴원하고 그 짓이 10번이 넘었다.
나는 소리 없이 철철 울었다.
어느 만큼 울었는지..
그누가 부부 동반 칠순 여행에 와서 이렇게 처절하게 울 수 있을까?
그러나 잔인하게도 아무도 나에게 흐르는 핏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이중인격자, 가면을 쓰고 있는 페르소나.
이는 내가 대학을 다니며 심리학을 하고, 종교 생활을 하면서 더 심하게 길들여 진 것 같다.
꼴에 부부 상담까지 하고 있으니 내 죄가 하나 더 붙었다.
  예전에는 남편이 나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종교 생활하는 여자가 뭐 그따위냐고..
그러더니 이제는 심리학을 하는 여자가 어째 그러냐구..
죄가 하나 더 붙은 셈이다.
 
  게스탈트 기법중에 (지금- 여기)
사람의 감정을 오늘 이순간에 맞추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분노나 아픔으로 많이 힘들어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걱정을 껴안고 산다.
`그렇치,
오늘 여기 여행을 온 순간을 위해 살아보다.
여행와서 밥 안하니 좋고
뱅기(비행기)타서 좋고
구경할거 많아서 좋고
맛난거 싫컨 먹여줘서 좋고
좋고 좋고 좋은게 많다.
이런게 좋은 순간을 어리섞게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훌떡 뒤집어 버렸다.
남편친구가 나에게 마이크를 줬다.
과거에 우리 부부가 아이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때마다
우리 남편 옆에  늘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고
언제가 기회가 오면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 기회가 왔다고.....
그리고 내가 딸이 시험에서 낙방하고 오고 싶지 않았는데 꼭 참고 왔더니 정말 안 왔더
라면 큰일날뻔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여행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함께 드렸다.
그리고 우리 부부처럼 밥을 먹어도 따로 먹고, 산책을 해도 부부가 다른
지인들과 어울려서 산책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 친구를 불러 세웠다.
00아빠!
"와이프랑 함께 다니세요.
밥을 먹을 때나 특히 여기 저기 구경다닐때 따로 다니지 마세요.
이러다가 나중에 큰코 다칠날 올테니 미리 막아야 해요."
어물 어물 남편친구가 반박했다.
우리 마누라는 나를 안 좋아해요. 혼자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해요."
하는 것이었다.
"여보슈 나는 여자를 좀 알지요. 당신 아내는 화딱지를 참고 있는 줄을 아셔요."하고
말했다. 멀리 여행가서 길을 잃어버려도 부부가 같이 떨어지면 돈만있으면 큰 걱정이
없지만 따로 떨어졌다가 길을 잃으면 낭패가 돼요.
큰코 다치기전에 마음 바꿔요 하고 말했다.
ㅋㅋ...나는 속으로(너나 잘하셔요.)하고 생각했다
나원참..
남의 부부를 그렇게 본드 발아 억지로 붙여 놨더니 그들 부부가 처음으로 나란히
손을 잡고 가이드를 따라 다녔다.


나도 남편 팔짱을 꼈다.
결혼 전에 팔짱을 껴보고 처음이다.
마침 비가 내려서 우산을 쓰게 되니 자연스러워 졌다.
왠지 남편은 팔을 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속의 무덤을 발고 밟아 뭉개버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다낭 앞바다에  다 버려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현실을 즐기는 것이다.

밤이 되었다.
남편이 함께 여행을 온  동창 부부 이야기를 했다.
아들 아이가 명문대 다니다가 사망하였다.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죽음이었다.
나는 눈을 딱 감았다.
딸이 시험에 망쳤다고 늪 속에 들어 갔던 나는,  다 큰 아들의 원인 모를 죽음을 맞이한
부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아주 지랄을 했구나. 아주 사치를 부렸어잉 ~
아들 죽은 부모앞에서, 시험에 떨어진 딸을 보고 좌절하는  부모는 진짜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베트남 특산물 쇼핑센타들려, 훼이쓰 스크랩을 한 보따리 샀다.
그동안 나때문에 마음아팠던 시댁 친정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이 훼이스 스크랩으로 발뒤꿈치의 각질을 제거 했더니
다리가 5센치가 짧아져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한쪽 발의 각질만 벗겨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웃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칠순여행을 맞쳤다.
그냥 모든 것 다 잊고 신혼처럼 살아 볼랜다.
많은 것을 깨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