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상을 받은 영감이 열무김치 생각이 나는가보다.
웬만해서는 요구가 없는 양반인데 . 값비싼 고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니 까짓 즉시 대령하지.
맘먹고 착한 마누라인 척 마트로 내달으니, 영감이 손사레를 친다. 넘어지기 잘하는 마누라가, 서두르다가 또 너머지지 싶어서 걱정을 하는가보다.
영감 뜻이 고맙긴해도 무시하고 내친김에 현관을 나선다. 찬바람이 제법 쌔~ㅇ하고 귓전을 때린다. 외출 할 일이 별로 없어서 그새 바람이 이리 차졌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날이 벌써 이렇게 추워."
"내복 입어."
내복을 입으라는 영감의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모처럼 영감은 지금 농담이라고 한 마디를 던지고는 내 표정을 살핀다. 영감은 지금,
"그래. 당신은 내복을 입을 때가 훨씬 지났지." 라고 비아냥거리는 중이다. 이제 좀 살아났다는 징조같아서, 비아냥거리거나 말거나 내심 반갑다는 말씀이지.
나는 언제나 추석이 지나면 내복을 입는다. 그리고 어린이날이 되면 벗어서 챙겨 넣는다. 남이야 아무러면 어떤가. 내가 입고서 춥지 않으면 족하지.
"오늘 밤에는 전기요를 걷어도 되려나?"
"안 되지."
오늘 저녁엔 영감이 제법 농을 많이 한다. 정말 살아났는가.
다른 때 같으면 나도 앙탈을 부려봄직도 하지만 오늘은 좀 봐 주자. 참아 주자는 게지.
참 요상한 양반이다. 이쯤되면 커피가 고프면 마누라에게 청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팡이를 짚고서도 손수 차를 타러 주방을 향한다.
"뭘하려고요. 커피요?"
"응."
"가 있어요. 내가 갖다 줄게."
마음 같아서는 이왕 나왔으니 타서 마시라고 하고 싶지만, 주방에 나온 것만으로도 고맙다.
아니, 이러다가 길게 길게 버릇이 되는 거 아녀?!
지팡이만 벗어버리면 모든 걸 원 위치해야 하는데 그게 잘 될지 걱정이다. 그이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내 손을 빌리지 않는 걸 나는 늘 대견해 했다. 그런데 요새로 엄살인지 꾀가 늘었는지....
허긴 영감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대령을 하고 버릇을 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영감의 움직임이 전만 같지 않을 걸 보면 내 손과 발이 먼저 움직인다. 이젠 나도 슬슬 꾀 좀 부려볼까? 아닌 게 아니라 큰딸아이가 출국을 하고나니, 이제 내가 힘이 들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