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산화탄소 포집 공장 메머드 가동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5,095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


BY 만석 2023-04-18

아마 지은 지가 적어도 20년은 됐지 싶은 초라한 단독주택.  사정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이곳으로 이사를 해서, 이 것도 없는 것보다 났다 하고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  싫다 하는 걸 준다는데, 받을 만한 사정이 있으니 안 받으면 바보지. 억지춘향으로 받은 집이 그래도 꼴 답지 않게 지하 1층에 지상 3층인데에다가, 식구가 단출하니 그런대로 별로 부족한 걸 모르고 산다. 어쩌면 큰아들 네와 손녀를 끼고 사는 재미도 있어서, 안성맞춤이라함이 옳기도 하겠다.

그런데 내 집의 오른 쪽으로 나즈막한 단독주택이 있어서, 우리 옥상에 오르면 제법 넓은 전망이 펼쳐 보인다. 이 또한 답답함을 덜어주기에, 이것도 복이라고 억지를 쓰며 산다는 말씀이야. 바로 옆의 1층짜리 단독주택을 건너서는 우리 집과 같은 높이의 3층 베란다가 마주보고 있어서, 가끔은 그 댁의 근황도 탐색이 된다. 이제는 주거를 위해서 투자할 능력도 없고, 투자할 필요도 가당치 않으니, 차라리 사는 곳의 좋은점을 찾아 그나마 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수 밖에.

어느 날. 옥상에 오르니, 단독 건너의  3층 집 베란다에서 조금은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온다.
"집 주인 아주머니세요?"
"예. 그런가 봐요."
워낙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옆 집도 윗 집도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사는 나다.  말을 건네는 이는 아마 그 댁 집주인 게다.

"금방 빨래 널고 가신 양반은 누구세요?"
"우리 집 영감님이세요."
"아유. 얼마나 좋으세요. 늘 영감님이 빨래를 다 널고 걷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면 세탁기도 영감님이 돌리세요?"
"예." 조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흉을 보려면 얼마든지 흉거리가 되겠으니까.

"아주머니께선 어디가 편찮으세요?" 편찮으시니 영감님을 그렇게 부려먹겠지 하는 소린가.
"이제 이 나이 되니까 여기 저기가 다 시원찮지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시키시면, 영감님이 늘 그렇게 말 없이 해 주세요?"
"아뇨. 남자들이 해 달란다고 시키는대로 하나요? 시키지 않아도 그냥 해 주시네요."
아마 환갑이 다가오거나 갓 지났을 성 싶은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손 놓고 말없이 섰다.

아랫층에 내려와서 생각을 하니, 영감이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하는 게 남의 집 남자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가 보다. 그렇다고 나는 놀면서 시키나? 언제적부터 그리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빨래를 널지 못할 정도로 시원찮은 사람도 아니고, 원래 잘 하던 사람도 아니지를 않은가.  그렇다고 요새 젊은 이들처럼 와이프를 알뜰 살뜰히 챙기는 사랑꾼도 아니고 말이지. 마누라가  누구네 아낙처럼 곱상이라서, 도와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언어도단이고.

시키는 일은 기를 쓰고 마다하는, 동창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고집불통'이었다지?!
다섯 시누이들 사이의 외동인 영감은, 바쁜 농사철에도 시누이들이 나서서 농사를 거들어도, 영감은 책만 들여다 봤다고  하지를 않던가. 시방 팔순을 넘긴 오빠가 세탁기를 돌리고 뒷정리까지를 맡아서 한다고 하면, 어느 시누이가 수긍을 하겠느냐는 말씀이지. 아마 가만히 듣고만있을 시누이들도 아니겠다. 그런데 영감은 성격대로 깔끔을 떨어서 제법 내 맘에 드니까 봐주지.

오~호라. 내친김에 하나 더 자랑을 할까?
요새로는 하지않던 버릇도 생겼더만. 미처 설겆이를 하지 못하고 물에 담궈 놓으면, 설거지도 해 놓더란 말이지.
이웃에 말 잘 듣지 않는 남편을 탓하는 새댁에게 내가 말한다.
"남자들은 나이들면  철도 들어요. 그때부터 마누라 말을 잘 듣는다네요. 좀 기다려 봐 봐요."
"아저씨는 원래 착하시잖아요."  그 새댁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