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오고 이런저런 행사가 지나고 나면 구정이 온다.
추석에 한번 , 구정에 한번 치러야 하는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고 친인척을 만나면서 공동의 유전자를 확인하는 끈끈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조상님이 만드셨는지 모르지만 추석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한여름의 고단했던 농사일을 위로하게 했다. 구정에는 한해를 마감하면서 집안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안부를 확인 하면서 덕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서로의 새해 소망을 응원한다. 한해에 두 번 하는 이 행사를 버겁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며느리 들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며느리 된 자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이다.
언제 부턴가 명절 증후군 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누군가는 스트레스로 화병이 생겼다고 하고 정신과 의사들은 명절 증후군을 질병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추석이 지나고 어느 방송에서 설문조사를 했더니 명절이 다가 오는 것이 천만 원짜리 빛 쟁이 가 오는 것 하고 똑 같이 느낀다고 한다. 그 방송을 듣다가 내 귀를 의심했다. 천만 원 이란 돈은 보통의 직장인이 일 년 을 꼬박 모아야 하는 거금이다. 짧으면 24시간 길게는 72시간 정도의 시댁 또는 처가 쪽 사람들과의 만남을 천만 원의 빛 쟁이 와 비교 하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방송에서 한 설문조사라니 믿기로 했다. 며느리들로 하여금 빛 쟁 이가 오는 것만큼이나 두렵게 하는 명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혈육으로 맺어지고 법으로 형성된 친척 관계에서 배려 없이 함부로 하는 말이나 친, 인척들과의 보이지 않는 비교와 경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명절은 빛 쟁이 가 오는 것만큼 두려울 것이다. 어려운 상대가 지나친 요구를 하거나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 등으로 상처를 받는다면 만나고 어울리는 것이 불편하고 피하고 싶을 것이다. 점하나로 글자가 바뀌듯 말이란 것이 ‘아’ 와 ‘어’ 가 다른데 혹시 ‘어’ 라 써놓고 ‘아’ 로 읽 으 라 강요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일이다.
한 달 전쯤 어머니가 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기에 뭐냐 물었더니 추석에 남동생의 아들이요 우리집안의 삼대독자인 조카가 제사를 모신 후에 여행을 가자고 하더란다. 갑자기 무슨 여행이냐 물으니 우리도 명절에 남들처럼 가족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다고 재차 이야기를 하기 에 이유를 물으니 명절에 자신의 엄마가 하루 종일 설거지만 하니 보기가 싫다고 하더란다. 조카가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가면되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내말에 그게 아니고 분명히 자기들끼리 미리 얘기를 하고 조카를 시켜 이야기 한 것 같다며 서운해 하더니 다가오는 구정은 어찌 하냐? 묻는다. 가끔 혼자만의 생각에 살을 붙여서 온갖 상상을 하는지라 남동생 내외를 만나 물어 보았다. 그런 적 없었고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기에 그렇다면 너희는 참으로 효자 아들을 두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하루 종일 설거지를 하는 것이 보기 싫어 그런 의견을 냈다니 얼마나 기특한 효자냐? 하며 함께 웃었다.
명절 때 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는 단골 청원이 “명절을 없애주세요.” 가 있다.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좁은 소견이다. 국민들의 사생활을 그것도 오랜 세월 가족 모임으로 대대손손 내려오던 것을 법이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개인의 종교도 국가가 나서서 침범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국민의 절대 다수가 쇠는 명절을 법으로 없애 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청원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하다보면 수 없이 많은 난관에 부닥친다.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언젠가는 나를 어머니로 만든다. 지금의 내가 아줌마라고 언제까지 아줌마이기만 하랴 나도 언젠간 할머니가 되고 누군가에게 피하고 싶고 부담스러운 수다 장이 할머니가 될지도 모른다. 가족들과의 고민과 분쟁에 국민청원이란 카드를 꺼내려 하지 말고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한 번 더 양보해서 나를 희생해 준다면 우리 조카처럼 “ 엄마가 하루 종일 설거지만 하는 게 보기 싫어요.” 해서 누군가를 감동 시킬 수 있지 않을까? 며느님들 부디 청원하지 말고 가족들을 감동 시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