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말씀하시는 어머님 말씀중에 하나이다.
정말 큰원인 제공은 빼드시고
모든 원인을 새식구로 들어온 나하기 나름이다.
이런억지 말씀을 늘 ..
지니고 계시니 무슨 말이 통하리요.
시집온지 나도 언 16년차인데.
이제 감싸주고 보듬어 주실때도 됐다고 생각하는데.
어찌그리 한결같이 남은 남이요 잘해 한번 못하면 밑빠진독이 되버리는건지.
정말 한탄쓰럽다.
시집와서 얼마있다 능청스럽게 시어미니한테 엄마소리 를 했다 그리하면 친근감이 멀어지는 감정이
가까워졌다는 주변 선배님들에 말씀을 듣고는...
헌데 그것도 사람을 봐가며 해야되는건 몰랐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친했던 친하력으로 벽이 있는 그틈을 얼마나 비비고 들어가려 했떤가.
하지만 그런 나에 친하력도 어머님 앞에선 한날 버릇없는 며느리가 될뿐 어디 시어미나한테
엄마소리를 하냐고 하신다.
그렇게 엄마소리는 호된소리로 입막음이 되버렸고
첫애떄는 몸을푸는걸 외할머니가 봐주셨다
둘째때는 딱일주일때 본인은 고무장갑끼고 개울가에 찬물로 빨래를 하셨더란다.
셋째아이때는 딸셋이라는 서러움에 아이를 본체만체 하셨고
몸조리마져 신랑이 집에서 몇일 도와주고 친정가서 풀고 왔다
늘어렵고 어려운 어려운 분이셨다..아니 지금도 내가슴이이 탁탁
틀어박히께끔 긴장을 부여해주시는 분
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시집와서 나에 서러움은 항상 늘 진행 이였다.
한번 화가나시면 꾸역꾸역 몇일을 두고본뒤 폭팔하시곤 했는데 그작은 체구에서 어찌 저런
성악가도 울고가 고음으로 소리를 내시는지 대단에 극치셨다.
시집오기전부터 신경정신과약을 복용하고 계신건 알고 계셧는데 .
늘 도를 넘치시니 정말 나에게도 한계였다.
아버님이 다혈질이시긴 했어도 금방 몇시간 후면 개어내시는 성격을 그마나 신랑이 닮아 다행이다
낮밤 바뀌시는 어머님보단 말이다.
어디 장단에 맟춰야 되는지.늘 내한숨은 늘어가기만 할뿐
그불안함에 독소는 서서히 내몸 어딘가에 쌓여만 가는듯..
아이들이 클때로 커서 우리부부가 큰소리내는 것마져 조심스러운데
젤어른이신 어머니에 노하심은 늘 진행이시다.
독불장군이신 우리어머님 주변에서도 소문이 자자하신분.
언성 붙었다 하면 싸움꾼이 되시곤 하셨다
동네 슈퍼를 가도 새댁이 대단하다고 할정도니.
말로만 들었음 몰랐을터 내가 모시고 사는 당사자니 그말에 울림이 느껴질뿐 이였다.
멋무르고 시집와 나에 시절
철딱서니 없었떤것도 사실이다 무얼 아랐겠나.
내나이 19세 큰아이를 임신해 20세에 큰아이를 낳았으니
철모르던 나에 그시기에 더 엄마손을 뿌리치고 나오던 그손길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울며 지세웠노라.
나만 아는 내얘기인것을.
친정 부모님과도 시부모님과는 부모님정도 되는 나이차
나한테는 우리 할머니정도에 연세들 이였다.
두분이 중매로 뒤늦게 연이 닿으셨으니 자식들도 다 늦둥이 자식뻘이 되신셈이셨다.
처음 몇년간은 정말 터무니 없는걸로 나를 나무라셨다.
정말 이유없이 매맞는 기분이 이런걸까 싶은적이 한두어번이 아니다보니
나중에는 따져 묻게 되드라
첫 시어머니에게 따져묻는게
어린내아이들을 뚝하면 뺨을 후랴치셨다.
소스라치게 그모습이 끔찍했고.
늘 놀란 마음을 참고 참았다
그러다 동네에 어떤아이가 왔는데 그 남자아이한테도 그스름없이 뺨을 갈귀시드라.
어찌나 그아이엄마한테 민망하고 그동안 에 눌렀던 순간이 폭팔했던
그날이 첫 대적이 였던거 같다
얼마 안되는 신랑이 벌어온 돈을 니들끼리 쓰는게 맞는냐며 따져물으시며
번돈에60%에 내놓으란 그당당한 그말씀이 기가막힐뿐이였고
연년생 아이들 감기약을 타갖고 한겨울에 하나 아기띠로 업고 하나 고사리손 잡고 호호불며
그언덕길 그꼬란질을 걸어내가며 오고가고 야속한 버스 는 제시간에 안오면
바닥에 눈보라가 바람타고 어린아이와 내얼굴을 치고 가는데 정말 과관도 아니였었다.
알다시피 감기한번 걸리면 몇번 연속으로 가게되기 마련이것만
자주 간다며 나가서 누구 만나고 오는거 아니냐며 몰래 쫒아갈라고 했다하질 않나.
대단들 하셨다.
늘 집안에 어른이시고 품위유지 지키고 집안에 평온을 지키셔야 될 분이
어머님에 이간질은 지속적이셨고 끝이 보이지 않으셨다
모시고 사는 우리에 노고는 없는체로 늘 시누집에 한뭉큼 받아오는 물직적인게 좋으실뿐이셨고
마실 나가신뒤면 누구에 누가 무엇을 해줬냐 머했내 남들에 비교대상자가 되었다.
그 이간질은 형제라고 하나 밖에없는 밑에 시누이와도 사이가 벌어지게끔 인도하셨고.
그책임에 회피는 늘 본인빼고만 탓 이셨다.
시집와 10년을 아버님 병원에 따라당겼다.
그러다 고부랑길 아이들데꼬 다닐라면 이제는 정말 운전면허를 따야한다는 나에 결심으로
붙자마자 아버님에 병원운전기사가 자연쓰럽게 되었다.
아버님에게도 서럽던 순간이없진 않았다
다만 아버님은 우리아이들을 늘 이뻐해주셨다.
그게 내묵은감정에 아버님에대한 미운감정에 용서였다.
아버님이은 동네 국립병원에서 진폐가 있으셔서 거이 반계절 병원에서 계시고 태원후 계셧다
다시 입원하셨따 그게 반복 이셨따.
마지막 병원을 입원하시기전
아버지가 고집을 피우시면서 어머니와 다투고있는거 보고 잠깐 화장실 들어갔는데
막내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서 나오니 지팡이로 몸여기저기 아버님을 있는힘껏
후려치시고 있는 어머님을 보니 참..기가찰뿐이였다.
한동안 놀란 아이를 얼마나 달랬던가.
집병원을 오고가고 하시다 어는순간엔
병원에서만 생활하셨는데 숫한약물 치료와 병이 악하되시며 치매끼도 동반되셨다
아버님은 항상 어머님을 늙은여우라 칭하셨다
침실에 멍투성이던 아버님이 조용히 내게 속삭이시면서 저늙은여우가 지팡이로 떄렷다곤 하시며..
어머님과 교대로 병간호후 집에 가려하면 가지말라고
아이들 뒷치닥 거리 하고있으며 몇일 집에일을 하면 빨리오라고 하시곤했다.
젊어서 고생을 시키셨단 말씀을 듣곤 했는데 ..
늙어서 보자는 ..그말이 저렇게 무서운말인줄 생생하게 깨닮게 해주실줄이야..
그러다 한번은 그날따라 정신이 맑으신 아버님께 왜 더진작에 애껴주시지 못했냐고
울먹 거리던 내게
어머니가 시키셨다고 그래서 그랬다고
지금은 저이뻐요??
고맙지..하신다..
그말씀은 아버님에게서 서운했떤 캐캐묵은 내마음을 다독여주고 가신 말씀
몇해면 80을 바라보시는데 언제쯤 어머님에 욕심과 사욕적인 욕구 는 비워두실런지.
오늘도 집안에 안녕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