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그렸다.
한참을 정성스럽게 장미를 그렸는데
아버지께서 오늘 장미는 안 장미다.
X다.
그래서 오늘 그린 장미가 안 장미가 되고 말았다.
고령의 아버지께서는 내가 그린 장미가 마음에 안드시나보다.
인테넷을 뒤져서 30여장의 장미를 찍어보내셨다.
"장미는 이렇게 그려야지."
이를 지켜본 친정집 오라버니가 한말씀 하셨다.
"다음에는목련을 좀 그려와라.
그러면 아버지 또 3일은 노신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깨진똥딴지처럼 받쳐들고 산 세월이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병치레를 안하시고 돌아가신것은아니었지만
떠나보낼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훌쩍 떠나신것이다.
어쩌면 나 때문에 더 일찍 떠나신듯..
내가 심페소생술을 반대했기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무렵 아버지도 환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장남이신 오라버니가 쇄약해져서
비실비실 잘못하다가는 오빠마져 무너질것같았다.
엄마는 어자피 사람노릇하기는 틀려버린듯,
아버지대신 오빠대신
어머니에 심페소생술을 거부했던것이다.
물론 나 혼자 결정한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상의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다.
상을 치루는동안에 그리고 49제가 지나갈때까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리고 절에서 칠칠제를 모셨기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씩 절에서 기도를 드려야하기때문에
일가친척 치닥거리에 어떻게 정신없이 지내다가 49제가 끝나고 나서는 홀로 남겨진 아버지때문에.
그리고 사는 동안 너무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 때문에.
그리고 나때문에 일찍 돌아가신것같아
그렇게 남편 얼굴도 못보고 돌아가시게 하신것 같아.
천지나 만지나 그렇게 애지 중지하던 아들도 못보고 돌아가시게 한것같아
마음이 애틋하다, 아니 알알하다. 절이 절이 하다.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아버지도 전립선 암이 셨던것이 발견되고 ,일을 삼아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면서 치료를 했더니
이제는 사람같은...그리고 오빠도 몸이 안좋아 퇴직을 일년이나 앞당겼었는데 다시 취직하고
그런대로 안정이 되어가는듯하다.
엄마 제사가 돌아오니 마음이 더 애잔하다.
얼마전에는 어머니가 안계신체 아버지 생신이 지났다.
손주들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아 놓았다.
그럭 저럭 워낙 자손들이 받들어 모시니까 아슬 아슬하게 엄마없는 공간을 메꿔간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