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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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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그 혈류를 타고 흐르다.


BY 가을단풍 2016-02-13

사람들이 말했다.

,내남편이 종갓집 장남이라고,

맨처음 시집올때 종갓집 장남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저 한집안의 장남인줄만 알았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정말 몰랐었다.

더구나 깡깡 시골'

 줄래 줄래 일가 친척이 몇타래씩 얽혀있는집의 종부가 무엇인지 몰랐다.

어린시절 한동래 모조리 살면서

끼니때면 밥그릇 눈치까지 봐야하는 그런집안의 장남을 선택한것이 바보짓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집에 어찌하다 시집을 간건지

또 우리 친정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그런집에 서스럼없이

덜컥 딸을 주셨는지...

지금도 우리남편은 그때일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자기에게 딸을 선듯 내어주신 장인 어른을 이해할수 없다고.

나는 그렇게 종부자리를  "확" 처들어와버렸다.

 나이가 너무 어리고 철이없어서 쉽게일을 저질러 버린것같다.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라 그런지

조상님들 무덤이 왕능만큼 크다.

그리고 그 윗대 조상님은 벼슬을 했다하여

지방 문화재로 등재되어 "군"에서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주기도 한다.

그런집 종부인 내겐 아들이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들이 없었으면 덜 했을지 모른다.

온갖 재롱 다부리고 가족들에게 즐거움을 주던 아들이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기때문에 더더욱 아들없는 종부에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나면서 내 심장 깊숙이 바늘 한쌈을 심어놓고 떠난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혀 있을수없는 일들이 생겨났다.

이유도 갖갖이인지라 일일히 다 열거할수가 없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울며 울며

아들잃고 슬픔으로 울며

시댁어른들과 갈등으로 울며

그러다보니 형제들과도 갈등이 생겨나고

그렇게 울며 불며 세상을 살면서

그냥 세 딸만 열심히 미친년처럼 길렀다.

세월이 가면서 시아버지가 나를 더 미워했다.

불편했다.

억울하지만 책임을 다하며 살았다.

시아버님 형제들과도 잘지냈다.

사촌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긴세월 살면서 남편형제들과도 늘 좋을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대로 잘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시아버지의 노기가 살아지지 않았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것은

노인들은 며느리를 미워하다가도 자기 자손들하고 잘 지내면

허물이 있어도 덮어주게 마련인데

시댁엘가도 못본척 눈을 척 내려깔고

두번 세번 인사를해도 못들은척

언제부터인가  "시아버지가 나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참 불폍한 일이다.

어머님과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었지만

편찮으실때 병간호를하면서 고부간에 속을 다 풀은 상태여서

그럭 저럭 나쁘지 않는 상태까지 되었는데

아니,차라리 긴 세월 살면서 어머님이 살아오신 세월이 가엽어서

더 잘해드리고 싶었다.

나름 불편함없이 모셔왔다.

그런데아버님께서 속에 뭐가 들어앉아있는지 알수없는 상태로 살아왔었다.

차라리 못마땅하면 뭐가 맘에 안든다고 꾸지람을 하던지

수년간을 그렇게 마음을 옹쳐매고 사시는 아버님께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술자리에서 돌아와서 하는말이

자기 부모가 나한테 왜 그러는지 이제 알았다했다.

이유인즉

손자때문에 그렇탄다.

손자를 못본 분노로 자기도 모르게 며느리만 보면 속이 복받쳐 올라와서 그렇다 했다.

"바늘이 쌈지체 혈류를 타고 흐르는듯 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워낙 아버님 어머님께서 자기 아들,딸을 차별없이 애지중지 하던 터였기에

영특한 손녀가 셋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얻지못한 분노로 며느리인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지 몰랐었다.

트집도 가지 가지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부끄럽다,

그러나 우리 친정식구까지 미워하는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섭섭했다.

그러나 이해를 못하는 상황도 아니고

그 시대 어른들 정서가 그러함을 알기에 그냥 참았다.

그리고 긴 세월을 표시없이 살아왔다.

사람들에게 덕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군말없이 제사 모시고

시댁부모 살피고

형제들과 우애있게 지내고

그냥 참아왔다.

뭐든지 그냥 참아왔다.

그리고 부모곁에서 살고있는 시누이들의 어려움을 같이 견뎌주었다.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정도로 말이다

이는 내가 잘해서만도 아니었다.

서로 부족하지만 흉허물 덮어가며 살아왔기때문이다

 

시동생부부에게도 나름 선덕을 베풀고 뭐든지 다 수긍하고 살아왔다.

그러면 나에 부족한 흉허물이 덮히는줄 알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시아버님의 노기는 걷추어지질 않았다.

언제가 시누이가 아버님께 여쭈어 보았댄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새언니를 미워하느냐고...

이유인즉

역시 손자 때문이란다.

시누가 말했다.

"언니,이건 아버지도 어쩔수 없는거 같어, 이해해야될것같어."이렇게 말했다,

"고모 나도 이미 알고 있었어."

시누이 얼굴에 눈물 이 고였다.

나도 울었다.

세월이 흘러 바늘도 무디어져 혈류를 타고 흐르며 꾹꾹 찔러도 예전처럼 아픔은 덜 하지만

오늘도 역시 바늘은 혈류를 타고 흐른다.

그 예전의 일이었다.

제사를 지내면 아들을 얻을수있을지 모르니 제사를 모셔가라 했다.

어린 나이에도 군소리없이 모셔왔다.

어머니 연세도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때문에 제사를 지내러 다닐수가 없어서

차라리 내가 지내는 편이 낳을것같아 그리하기로 했다.

제사를 모셔오는날  지방 네분상을 놓고

조상님께 "고"하라 하시면서

삼사실과(사과,배,밤,대추)를 차려놓고 술잔을 부으라했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지 제삿상으로 눈꼽만한 초파리가 생겨나서 한두마리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참 그때 상을 잘차려서 삼사실과는 물론이고 포도며 귤이며 딸기까지  올렸던것 같다.

아마도 포도에서 초파리가 생겨난것같다.

남편에게 몇번 전화를해도 오지 않았다.

할수없이  지방 네개를 써서 딸 셋과 잔을 올렸다.

다음날 시어머니께 눈치도 없이 일러받쳤다.

당신 아들이 조상님께 제사를 "고'하는데 안들어와서 초파리가 생겨서 내가 그냥 했다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걔가 아들없어서 그렇타고. 
 바늘이 혈류를 타고 흘렀다.

그렇다. 나는 혈류를 타고 사는 여자가 된것이다.

또 그언젠가의 일이었다.

조상님 묘자리에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산소를 몽땅 옳겨야 했다.

납골당도 만들고 아주 거창하게 비석을 세웠다.

귀저기를 찬 저 밑에 사촌들이 낳은 아기들까지 비석에 즐기하게 이름이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딸들 이름석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아버지 눈치가 보였다.

이혼하고 장가들어 아들을 낳는다고 펄펄뛰던 내 남편 얼굴을 외면했다.

커다란 바늘 한쌈이 쌈지체 혈류를 타고 흘렀다.

 

어느덧 여자 세상이 되었다.

아이들이 참 잘 커주었다.

아직 덜 자랐기때문에 장차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성격이 밝고 애교있고 사람들 잘 따르고

사촌들끼리 잘 지내고

어미에 고통과 무관하게 아이들이 참 철딱서니 없이 밝다.

비로서 우리 시아버지가 나를 향하여 쪼금 마음을 풀어가는듯.

아들타령하던 우리남편은 어느새 다른 자식 누구도 눈에넣치않는

자기 딸셋만 은소반에 받쳐않고 있어서 눈꼴이 시다.

모든거 용서하고 이해하고

어루만지면서 살아온 삶이 잘했다 싶으면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

그래도 바늘은 여전히 혈류를 타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