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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는 인생(1)


BY 편지 2015-07-20

누구나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내가 사고를 치지 않았는데도 주변에서 사고를 치는 가족이 있다 보면 한번의 사고라도

옆에 가족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점점 번져 고요했던 연못이 흔들리듯이

그게 돌멩이 수준이 아니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가는 태풍이라면

연못은 모양이 바뀌고 그 옆에 살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파괴가 되듯.

우리의 결혼생활은 큰 태풍을 한번이 아니고 여러 번 만나게 되었고,

그리하여 집안 형태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남편은 태어날 때부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듯 부잣집을 물고 태어났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대학도 나온 사람이다.

남편 집안은 누나 둘과 형 둘이 있는데, 이들도 명문대를 나왔다.

제일 큰 누나가 팔십이 다 되어 가는데, 이대를 나왔다고 하니

우리 집과 비교할 수 없는 집안이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분유를 박스 채 사놓고 먹었고, 과일도 박스로 쟁여놓고 먹었고,

타고 있던 세발자전거를 지나가던 엿장수한테 엿으로 바꿔먹었다고

자신의 과거를 역사 속의 위인인 것처럼 떠벌렸다.

된장국은 안 먹고, 맑은 국만 먹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맑은국이 뭐여? 된장을 맑게 푼 걸 말하는 겨?”

양지머리를 덩어리 채 넣고 푹 끓이다가 기름을 건져내고,

양지머리 쪽쪽 찢어 양념해서 얹어 먹는 국.

난 명절 때나 한두 번 먹는 괴기 국을 남편은 내가 된장국을 먹듯 매일 먹었다는 말이었다.

결혼해서 청국장을 끓였더니 있는 대로 인생을 구기며 다음부턴 끓이지 말라고 했다.

지랄, 미국 놈인가.

남편은 햄을 좋아했고, 쇠고기를 좋아했고, 계란 후라이를 좋아했다.

총각 때부터 자신의 자가용이 있었고, 80년대는 대기업 임원들만 자가용이 있던 시절이었다.

월급을 받으면 혼자 다 쓰고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한테 용돈을 받아 썼다고 한다.

키가 작고 인물은 없는 편이었지만 부잣집 아들이라 부자티가 나서 기름져 보이기는 했다.

 

심성은 착하다.

그 집안 사람들도 교도소는 커녕 경찰서에도 들락거리지 않던 법을 잘 지키는 집안이었다.

공부들을 잘 했고, 진공관이 있는 전축에 레코드 판을 걸쳐 음악을 듣고,

니콘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형들도 대기업을 다녔고,

누나들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가 집에서 신부수업만 하다가 시집을 갔다고 한다.

시누들 남편 분도 무슨 무슨 은행에 본점에 인사 팀에서 높게 앉아 있다고 했다.

대단한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아버지 없고 가난한 집 딸인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우리 집안은 내 새울 것이 없는, 대단한 벼슬을 머리에 얹고 있는 사람이 없는

가난한 편에서 사는 농사꾼이 많은 평범한 집안이었다.

 

반대를 했던, 부족한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던, 우린 결혼을 했다.

남편 형제들은 결혼하면 시집에서 기본으로 집을 사 줬지만 우린 독채 전세를 얻어 주었다.

나중에 애기를 낳으면 집을 사준다고 했다.

가난한 동네 방한 칸에 살았던 나는 독채 전세를 얻어 준다고 하니

하루아침에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되었다.

가난한 집 딸이 부잣집 사내를 만나 친정을 도와주고 잘 살았다는 그런 소설이나

연속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나를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부러워했다.

방 두 칸에, 넓은 거실에, 넓은 부엌에, 베란다까지 있는 연속극에 나오는 부잣집이 바로 나였다.

방 한 칸은 옷 방으로 쓰고 하나는 침실로 썼다.

문갑 위엔 연 주황빛 유리 스탠드가 신혼 방을 더욱 분위기 있게 비춰주었다.

베란다엔 책장을 넣고, 책장엔 처녀 때부터 좋아했던 삼중당 문교를 가지런히 꽂았고,

무늬가 알록한 자주색 카펫을 깔았다. 부엌엔 사인용 나무 식탁을 넣었고,

부엌 창과 방 창엔 가을 나무가 살랑살랑 창문을 간질였다.

 

그런데 결혼하고 첫 월급날, 남편은 월급을 내 통장으로 넣어주지 않았다.

월급명세서도 보여주지 않았다. 통장으로 돈을 넣어달라고 해도 알았다고 대답만 하곤

빈 통장뿐이었다. 다음달도 월급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월급 어떻게 된 거냐고.

난 결혼해서도 월급 안 주려고 했어.”

남편은 획 돌아 누웠고, 금방 코를 골며 자버렸다.

남편은 머리가 땅에 닿다 하면 자는 사람이었다. 나는 밤새 잠을 잘 수 없었다.

빈 통장이 서랍 속 가계부 갈피에 있는데, 도저히 잠을 편안하게 잘 수가 없었다.

남편은 대기업이라서 대체적으로 퇴근시간이 일정했지만 결혼한지 한 달이 지나고부터는

매일 새벽에 들어왔다. 왜 늦게 오는 거냐고 나는 다시 물어봐야 했다.

남자가 늦게 들어올 수도 있고, 일하다 보면 그런 거지 피곤하니까 더 묻지 마.”

그러더니 획 돌아누워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신혼이었는데 나는 허구한날 남편 등만 보며 밤이 깊어졌고,  신새벽이 왔고,

창문 너머 스산한 아침을 맞이며 신혼시절을 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뭔 잘못을 했냐고 묻기도 하고,

잘못한 게 있음 고치겠다고 했으나 남편은 내 잘못은 없다고 했다.


결혼한지 일년이 지나고, 애기가 태어난 뒤 남편은 회사를 그만 두었다.

회사 돈을 횡령한 죄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듯 순식간에 싹둑 잘려 나갔다.

회사 돈은 쓴 이유는 도박 때문. 회사 돈은 시집에서 갚아 주었다.

안 그러면 교도소에 쳐 넣고 전과자가 될판이니까 갚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시어머님이 말씀하기를 회사 돈 갚아 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총각 때부터 그랬단다. 워낙 사람을 좋아해 사람들과 만나 유흥을 즐기며 산 세월이

총각 때부터라고 시어머님은 덤덤하게 내게 고백을 했다.

몇 달만 있음 아이가 태어나는데, 배속에 있는 아기 때문에 난 잠을 편하게 잘 수 없었다.

실업자가 되고 큰 돈을 썼음에도 남편은 코를 골며 잘도 잤다.

딸이 태어났다. 미역국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여전히 남편은 밖으로 나가면 들어오지 않았다.

미역국을 못 먹어 젓이 나오지 않아서 분유를 먹었다. 분유 살 돈이 없었다.

할 수 없어서 결혼반지를 팔아오라고 했다. 남편에게.

추운 겨울이고, 산후 조리 중이라 남편 혼자 보내며 몇 번의 다짐을 했다.

현금 잘 챙겨서 꼭 갔다 줘. 분유도 없고 애기 내복도 사야 하니까 도박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

반지를 가지고 나간 그날 밤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 돈으로 도박을 밤새 하고

몇 만원만 내게 갔다 줬다. 시계도 팔아야 했다. 그것으로도 남편은 도박을 했고 술을 마셨다.

다행이 시집에서 쌀과 연탄과 몇 만원을 시어머니가 내게 찔러 주었다.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니. 재가 어릴 적부터 돈을 물쓰듯 썼고, 총각 때도 그랬잖니. 참아야 한다.”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했다. 이혼을 하자고 말한 내가 더 겁이 났다.

친정으로 갈 형편도 안되었고, 친정엔 방 한 칸에 한창 공부중인 두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편을 피해 들어갈 집이 없었으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 비참함이란……

그리고 제일 중요한 애기가 내 몸뚱아리에 안겨 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갈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죽자고 했다. 이혼보다는 우리 세 식구 죽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남편도 순순히 말을 들었다.

내 말을 우습게 여기고 한마디도 듣지 않던 남편이 이럴 때 말 잘 듣는 남편이 되었다.

진작 말 좀 잘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영혼이 빠진 목소리로 남편을 원망했다.

연탄을 방에 갖다 놓고 창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나는 애기를 옆에 끼고 누웠다.

유서도 쓰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게 쓸 얘기도 없었다.

머리가 베게만 닿으며 자던 남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죽을 각오로 정신차리고 살게.

처음으로 말다운 말이 남편 입에서 나왔다. 대견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면 못 살 것도 없잖아.

 

전셋돈을 빼서 생활비로 쓰고 전세가 싼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산다고 연고지도 없는 똥개천이 흐르는 낯선 곳에 둥지를 틀었다.

남편은 여전히 실업자고 여전히 나갔다 하면 들어오지 않았다.

도박은 무섭게 질기고, 생명력이 끔찍하게 강했다.

마차가 지나가도 살아내는 질경이처럼, 호미로 캐고 캐고 캐도 새롭게 태어나는 쇠비름처럼.

뽑아도 뽑아내도 어디선가 다시 날아와 밭 안으로 가득 피어나는 허연 개망초 꽃처럼

질기고도 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