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력이 한 장 남았다.
2013년도 이루어놓은것이 없이 저물어가고 있다.
당산동에서 고모와의 생활도 이제 두달째 접어들었다.
안식년을 맞아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는 사촌동생 부부는 이태리의
미술품에 감탄을 한다는 메일을 보내오고 고모님께 메일을 읽어드리니 컴퓨터만 열면
나란히 앉기를 즐기시면서 내 글을 쓰는데 여간 방해가 되는것이 아님을 모르신다.
‘교수였으면 머하나.’ 하는 내 농담에 웃곤 하시지만 진정한 내 뜻은 모르시는것 같다.
구십세가 넘으셨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큰것을 바라지는 말아야겠다.
아침이면 우유 한잔과 사과 사분의 일쪽과 떡 한쪽으로 식사를 하신다.
나도 덩달아 빵 한쪽과 사과 사분의 일쪽을 놓고 소식을 하게 되니 늘 배고프긴 하지만
몸은 가벼운것 같다..
육십대와 구십대의 식욕은 다른 모양이다.
“혹시 이다음에 심서방이 혼자서 불쌍하게 살게 된다면 네가 거두어줘야하지 않겠니.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네가 사십년을 함께 한 부부잖니.“
“그럴 일은 없을거예요.”
“그 사람 난 좋아했어. 우리 집안에 유일하게 남자다운 인물이었지.”
“여자한테 인기가 있었으니깐.”“나도 여자냐?”
“그럼. 고모도 여자지.”마주 보며 웃었다.
고모가 그 사람을 왜 그리 좋아 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자꾸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고모를 피해서 방으로 들어왔다.
분당 사시는 고모님도 같은 말씀을 하시는것을 보면 고모들한테 점수를 얻긴 했던
모양이다.
부부가 함께 해로를 할수 있다는것도 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리 살지 못했지만 아이들 부부는 잘 살아주기를 바란다.
요즘 내 기도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일이다.
오랫만에 아이들을 보러 응암동에 갔다.
출장 가는 아빠를 배웅하고는 달려와 내 품에서 울음을 터트린 윤지를
안아주면서 괜히 가슴이 내려앉았다.
윤하는 언니에게 할머니 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내 목을 끌어안는다.
이 아이들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했다.
한해가 저물어가니 작은 일에도 마음이 아프고 우울해진다.
떠나온 집은 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임대아파트는 당첨이 될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올해 안에 어떤 변화를 꿈꾸는것은 과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