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를 달라고 큰 입으로 쪼아대는 기러기를 처음 마주한 목사님과 사모님이 신기해 하셨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를 배경으로 수 만 마리의 철새가 하늘을 뒤 덮으며 날아 오르는 장관이 펼쳐진다. 왼쪽은 남편, 오른쪽이 목사님. 현재 서울 신림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계신다. >
- 나 아니라도 다른 교인들이 목사님을 도와 드리고 챙겨드릴 것이다.
- 나 아니라도 근교 아름다운 여행지나 유명한 곳을 모시고 다닐 것이다..
- 나 아니라도 맛있는 음식에 명절이나 때때마다 선물이 넘쳐 날 것이다.
- 나 아니라도 사람들의 고민과 경조사의 중심에 계시니 나까지 보태지 말자.
그래서 나는 목사님과 일정 간격을 유지하는 교인에 속한다.
목사님 생일이나 개인 경조사에 교인들이 돈 거둬서 선물 사는 일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진정 축하 할 일이라면 각자 직접 준비해서 전하는 게 옳다는 생각때문이다.
그것이 설사 스타벅스 선물권일지라도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목사님께 드리는 선물이기때문에 성경적으로 올바른가 반추해보며
군중심리에 끌려, 나만 빠지면 안될 것 같은 눈치보기를 질색한다.
나보다 어리거나, 어려움에 처한 교인을 돕는 일이라도
공개적이지 않기를 선호하고, 도움이 \'섬김\'이라고 포장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의 마음, 이기심이 포함될까 스스로를 경계한다.
그래서 광고시간에 공지된 교회 행사와 헌신해야 할 부분은 큐티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Working\'이 아닌, 순종의 마음이길 스스로 단속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신실한 교인, 착한 교인 대열에서도 멀찍이 서길 원한다.
내가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필리핀에서 목사님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데인\' 전력도 있고
한국사회의 신앙인과 이민사회의 신앙인이 많이 다른 출발과 지향점을 가진 것에 대한 상처...
그 상처가 만들어 낸 트라우마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필리핀 교회에서의 겪은 일들은 지금도 그게 정말 현실이었던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소설도 아주 자극적인 소설에 속하는 그 일들을 세월이 더 흐르면 말 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인건비가 저렴한 가난한 나라 우리 교민 사회의 단면이
신앙생활이라는 형태를 빌어 가시화 된 것일 수도 있다.
한 달 30만원이면 가정부와 운전기사, 아이보는 \'내니\'까지 두고 사는
생활을 마치 한국에서부터 누리고 살았던 듯 착각을 하며
돈의 가치를 잊어버린 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갑자기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보다 사람들과 관계에 열중하는 \'일요일 교인\'....
낮은 환율로 얻은 프리미엄, 시간의 자유와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억눌렸던
몸과 마음의 탈출, 가사와 육아로부터 해방....
그 모든 억압으로부터 완전무장해제된 자유를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해소할
적절한 장소가 교회라 할 수 있다. 외도나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닌 교회에 몰두하고
교회 일에 앞장 서는 일은, 누가봐도 건강한 \'중독\'이며, 바람직한 중독일 수 밖에 없다.
왜 나는 그들의 열정을 \'신실함\'이라 하지 않고 굳이 \'중독\'이라 표현하는지 생각을 해본다.
진정한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몰두,
지탄받지 않고 가장 고상한 품격을 유지하며 자유를 즐기고
자신을 과시하고픈 욕망을 해소하는 사교장으로 활용하면서도
태연히 \'신앙\'으로 포장한 그들에게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 중독\'이 결코 신실함과 다름을 증명하는데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외도나 도박, 알콜중독 등의 사회문제형 탈선보다
더 위험하고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 탈선이다.
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탈을 쓰고 있어
심취할 수록, 심각 할 수록 \'신실함\'으로 오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 또한 교회내에서 순종하는 진짜 양들보다 크고 강하지만
누구도 충고하거나 제어하기 어려운 건, 성령의 행하심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직 눈에 보여지는 그들의 행위가 먼저 사람의 판단 기준이 될수 밖에 없다.
그들을 눈여겨 보면 그들의 하나님은 \'돈\'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든다.
직분도, 헌신도, 사랑도, 은혜도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 들고
교회를 비즈니스처럼 목사님을 경영자로 인식하며 성도들을 직장의 상하조직으로 대하고
교회가 경영 마인드로 운영되어지길 주장한다. 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는 야합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니 일반 성도들의 헌신이나 사랑을 폄하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를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교회내 조직과 모든 이벤트의 중심에 있길 자처하며
기도보다 말씀보다 \'돈\'의 힘으로 얻어 낸 \'인심\'으로 자신들이 축복의 통로라 자처하는 죄를 범한다.
이민교회는 이렇게 자발적 \'중독\' 교회인, 커뮤니티센터로 착각하는 교회인, 생계형 교회인......
다양한 모양의 사람들이 모여, 오래 전부터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섬김과 헌신하는 양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시험에 빠뜨린다. 그래서 마음의 중심을 잡고 오직 하나님만 향하는
신앙생활하기가 외국에선 더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행여 그들의 모습이 비신앙인들에게
참신앙인의 모습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문명의 오지 중에 오지에서
풍토병과 싸우며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부르짖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기도로 흘리는 눈물의 공로가 가려지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턴~~~~^^!
원주민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우리 교회로 오신 목사님께서
목사님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내게 편지 한 장을 건네주시곤 단상으로 올라 가셨다.
기도 시간에 가만히 펴 보았다.
\"집사님, 갑자기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집사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예배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목사님!! 이럴 수가 있어요? 에??!!!
했을지도 모르겠다.
밴쿠버 다운타운에 \'한국어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목사님 의견에
한국의 교과부와 대사관에 교재지원 및 허가 진행 중이었고,
다음 학기 교수 계획서 제출을 해야 하는 남편은 바쁜 가운데
2013년 개교에 맞춰보려고 애쓰던 중이었다.
속이 상한 이유는 또 있었다.
목사님과 교회내 한국어학교 세우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관심갖고 있던 한국 기독교 대안학교의 초청을 거절했었다.
한국에서 교사였던 남편은 캐나다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보다 대학이 아닌 우리 아이들에게
선진교육을 접목해 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나 목사님의 거취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가시기 전 뵙기로 했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우리 교회는 교인의 80%가 한국인 유학생들로 챙기고 섬겨 줘야 할 대상들이다.
재정을 채울 수 있는 직장인 일반인이 많지 않아 목사님 월급도 겨우 챙겨드리는 형편이라
고등, 대학생인 쌍둥이 형제를 둔 목사님과 사모님의 고생은 뻔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작별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나 아니라도 누군가\'수차례 송별회를 해드릴텐데,
겨우 밥 한끼 사드리려고 뵙자면 오히려 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컸지만
그냥 보내드리기엔 너무 섭섭해서 모든 송별회가 끝났을 법한 출국 전날 점심 약속을 했다.
공항 근처에 자리잡은 일식당에서 점심을 대접하고 일어서는데
햇살은 왜 그렇게 화창할까. 감춰 둔 이별의 아픔이 울컥 올라왔다.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그곳을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열 번쯤은 모시고 갔을테지만
지난 가을 억새가 펼쳐진 위로 수 만마리 철새떼가 날아 오르는 공원을 향해
목적지도 말씀드리지 않은 채 차를 몰았다.
\"목사님, 사모님, 와 보신 곳이라고 거부하실까봐 납치했어요.ㅎㅎㅎ\"
뜻밖에 두 분은 처음 이라고 하셨다.
\"버나비 마운틴 가보셨죠? \"
-아뇨~
\"아이오나 비치는요?\"
-아뇨~
\"굴잡는 나노스베이랑 토피노에두요?\"
-아뇨~~~
\"꽃게 틀 놓아서 게 잡이하러 벨카라엔요~?\"
-거기가 어디죠?
\'나 아니라도\' 누군가와 늘 함께 계실 것만 같았고
\'나 아니라도\' 누군가 모시고 다니리라, 누군가 챙겨 드리겠지, 누군가 대접 하겟지...
생각했던 나의 철석같은 믿음이 점점 미안함으로 흐르고 있었다.
내가 말한 곳은 밴쿠버에 사는 사람이라면 점심 먹고 산책코스로 휙 다녀 올 거리다.
하지만 다음날 출국하시는 목사님 내외분께 나는 아무 것도 해드릴 시간이 없었다.
\'나 아니라도\' 누군가 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한번쯤 \'가실래요?\' 여쭤보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웠다.
비로소 깨달았다.
\'나 아니라도 누군가 할 것\'이라는 생각은, 내가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합리화였다는 걸
\' 나 아니라도\' 누군가 해 주겠지... 미룬 일로 내가 놓친 축복의 기회가 얼마나 많았을까.
\'나 아니라도\' 괜찮을거야..... 하찮게 생각한 일이 누군가를 외롭고 절망하게 만든 일은 또 얼마나 될까.
앞으로....... 누군가에게 미룬 그 일의 누군가가 할 일을
\'내가 하자\'고 다짐하는 주말이다.
-- Have good weekend~~~~~~~~~~-
캐나다에서 *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