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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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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자전거


BY 그대향기 2012-05-25

 

 

 

                                    아버지와 자전거

 

 

 

 

벚꽃마라톤이 내 고향 경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맘때쯤 내 고향 경주는 한 송이 커다란 봄꽃으로 피어난다. 신라 천년의 숨결이 벚꽃과 함께 피어나 역사하는 경주가 된다. 늘 느끼는 거지만 많은 능들과 첨성대와 안압지 같은 유적지를 보면서 경주는 시 전체가 선이 둥글고 푸근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시 곳곳에 풍만하게 솟은 능들을 보면서는 만삭의 임산부 같다는 느낌이었고, 첨성대는 봄바람을 한껏 받은 시골처녀의 긴 치마폭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안압지는 모나지 않고 편안한 둘레나 그 안에 담긴 물이 마치 엄마의 둥근 마음 같고 엄마의 양수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은 아마도 고향을 오래 떠나 있었고, 힘들었던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외로움을 달래느라 걷고 또 걸으며 경주 시내를 방황하던 시간들의 잔영이리라.

  나도 삼남매를 공부시키는 엄마가 되어보니, 한 부모가 여러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얼마나 벅찬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고작 삼남매지만 내 부모님은 5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공부시키시느라 참 많이 힘드셨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중학교 때 일이니 많은 세월이 지난 일이다. 나만 어려웠던 시절이 아니라 다들 고만고만한 사정들이었던지 등록금 납부일이 한참 지나고도 못내는 학생들이 많았다. 매번 단골로 늦은 학생은 단연 나였다. 담임선생님들은 차마 어린 학생들한테 모진 소리를 못하고 형편껏 가져오라고만 하셨다. 등록금 납부가 늦어지면 교감선생님이 직접 돌아다니시면서 독촉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교감선생님은 교실 문을 부서져라 세게 밀치고 들어서다가, 열린 문이 반동으로 도로 튕겨 미쳐 교실 안으로 다 들어서지 못한 교감선생님의 옆얼굴을 때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할 시간도 없었겠지만, 우리는 이젠 죽었구나 하고 잔뜩 겁에 질린 눈길로 교감선생님의 얼굴을 건너다보는데, 휴우... 다행이다. 피라도 났더라면 어쩔 뻔했어? 덕분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교감선생님은 짧고 단단한 대나무 뿌리로 만든 회초리로 교탁을 탕탕 내리치며, 등록금 못낸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고까지 하시며 고함을 질렀다. 

  이북사투리가 뻐드렁니 사이로 뜯겨지듯 터져 나오고 목울대의 핏대가 성이 나 날뛰는 모습은, 꼭 독 오른 가을 뱀이 지나가던 차에 머리만 얼 치인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우리가 학교하고 채무관계가 있는 빚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죄송한 척, 잘못한 척은 하고 앉아 있었지만 눈은 내리깔고 교감선생님의 이름을 연필심이 부러져라 꾸욱 꾹 눌러 적으며 골탕 먹일 저주를 퍼부었다.

 

집에 가시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자전거에 빵구나 나버려라

운동장 조회시간에 바람이 불어 포마드 잔뜩 바른 대머리나 다 날아가 버려라

점심 도시락에 돌멩이를 씹어 틀니나 부러져 버려라

속으로 낄낄대며 교감선생님을 저주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이야 수십만 원짜리 휴대전화부터 백만 원이 넘는 컴퓨터까지, 큰 어려움 없이 부모님들이 장만해 주는 형편들이지만,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그런 기계들도 없었고 어려운 가정들이 많았다. 특히나 우리 집은 남들보다 조금 더 어려운 형편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남의 집에 소작을 줄 만큼 넉넉한 편이었다고 들었다. 결정적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나이 삼십대 후반의 사고 때문이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쉬는 날, 같은 동네에 살던 동료분이 집안에 일이 있다며 아버지께 대리 근무를 부탁하셨고, 아버지는 흔쾌히 받아 주셨다고 한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런 이야기가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날 아침 엄마는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꿈자리가 좋지 않으니 그냥 집안일이나 하시며 하루 쉬라고 만류했지만, 여자가 재수 없게 남편이 일 나가는데 방정을 떤다며 한마디로 묵살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찜찜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일 보내시고 엄마는 불안하기만 했다. 빨래 두어 가지 주물러 널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철 대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아버지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 서셨다. 얼굴을 수건으로 감싼 손바닥 사이로는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간밤 꿈자리까지 사나웠던 엄마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대신 큰일이 생긴 것을 직감적으로 아시고는 택시를 잡아 아버지를 끌다시피 태우고 큰 병원이 있는 대구로 가자고 하셨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엄마는 고통으로 토막토막 끊어졌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설명으로 아버지의 눈이 심하게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가 실수로 무거운 짐을 집어 올리는 쇠갈고리로 아버지의 눈을 찍어 버렸다. 쇠갈고리에 찍혀버린 눈동자는 쏟아져 나왔고, 아버지는 응급처치도 없이 그 길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니 엄마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큰 병원에나 가실 일이지, 그 몸을 하고 집에는 왜 걸어서 왔냐고 울먹거리다가 야단을 맞았다고 했다. 대구 큰 병원에 가서 빨리 수술을 하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또 여자가 재수 없게 나선다고 야단을 쳤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대로 대구 큰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는 여러 번의 눈 수술을 하였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한쪽 시력을 잃으셨다. 사흘 굶은 개도 안 물어 갈 그 남자 자존심이 뭐하는 물건이기에, 재수 없는여자 말만 들었어도 아버지는 재수 없이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을 당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수술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의안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한쪽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성한 눈 한쪽으로 세상을 봐야했던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사는 날이 더 많으셨다. 그런 날이면 성난 눈빛은 어둠을 뚫고 일렁거렸다. 허공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노려보셨다.

 아버지를 대신 근무하게 했던 그 동료는 피해보상 같은 거는 일체 없었다고 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 했다. 그런 구백 냥 중에서 아버지는 사백 오십 냥을 잃은 것이다. 피해보상이 야속했던 게 아니라 매일 우리 집 앞으로 지나다니면서도 끝내 모른 척 하여 아버지를 외롭게 했던 그 친구 분을 기다렸던 세월이 억울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친구의 일을 일체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어쩌다가 엄마가 억울하고 또 야속해서 몇 마디 하소연이라도 했다간, 엄마 말끝이 채 여물기도 전에 벼락같은 고함으로 불호령이 떨어지셨다.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 날 일을 발설하지도 마라.

그 말을 할 때 아버지의 외눈은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드릴 말씀이 있어도 아버지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편하게 하지 못했다. 평소에 아버지는 잘 웃지도 않으셨다. 한쪽 눈을 잃으면서 세상을 살아갈 의지도 욕망도 같이 잃어버린 아버지는, 시력의 장애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장애를 입은 듯 늘 마음 한쪽이 서늘해 보였다.

 가정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고, 자식들 가르치는 일에도 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셨다. 어린 자식과 가정을 버려두고 노름방에서 여러 날 동안 돌아오시지 않는 날이 잦았다. 월급을 받는 날에도 집으로 곧장 오시는 일이 없었다.

 술집에 먼저 들러 한 달 동안 마신 외상술값을 갚아 버리고 나면 집으로 가져 오는 월급봉투는 언제나 깃털같이 가벼웠다. 월급날이면 늘 늦으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모시러 단골 술집으로 가야했던 어린 나에게는, 갓난아기 주먹만 한 왕 눈깔사탕이나 부채 모양의 과자 봉지가 들려지곤 했다.

 월급날이라고 특별한 선심을 쓰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쓸 돈도 없었지만. 평소에도 주전부리를 사 오던 아버지가 아니셨기에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월급날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린 5남매의 공부에 필요한 돈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에 어린 자식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조르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였고, 앞집 뒷집 돈을 꾸러 가야 했던 사람도 엄마였다.

 

 그런 가정형편에서도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새 봄처럼 씩씩했다. 믿는 구석도 없는데 항상 쾌청하게 맑게 갠 가을 하늘 같은 명랑한 아이였다. 가난 때문에 그늘진 얼굴은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주변에 친구들도 많았고 공부는 썩 잘함은 아니었지만 보통 이상은 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우월한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건 키가 크고 뼈대가 실한 거였다. 오빠들만 있던 집안의 외동딸이라 그런지 목소리까지 크고 우렁찼다. 그런 이유로 웅변을 하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모습들로 하여 중학교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회장직을 맡고도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말씀 드리질 못했다. 우리 집안 형편을 너무나 잘 아는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그러구러 눈치만 보던 어느 날, 저녁을 먹고 그날따라 약주를 덜 하신 아버지와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학생회장이 된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기쁨 반 걱정 반인 묘한 표정이었고, 아버지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웃음이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갈 시간에 설거지를 하시던 엄마가 오빠들 모르게 날 부엌으로 불렀다. 엄마는 부엌 모서리에 쓰러질 듯 서 있던 찬장에서, 퍼런 녹이 쥐 오줌처럼 얼룩진 놋주발의 뚜껑을 소리 나지 않게 열고, 꼬깃꼬깃한 지전을 꼭 쥐어 주셨다.

 그 돈은 가족들 모르게 천하게 버려진 그릇처럼 찬장 한 구석에 있던 놋주발에 한 푼 두 푼씩 모은 엄마의 비상금이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수고한 애들하고 간식이라도 사 먹으라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당장 생활비도 모자라는 형편에 그 용돈은 내게 아주 큰 선물이었다.

 나는 학교에만 가면 늘 행복했다. 학생회장 자리가 신났고 친구들이 더 많아진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깟 등록금 늦게 내는 거야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었으니 기죽을 일도 아니었다. 늦게 내더라도 꼭 낼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학생회장이 되고부터는 학교를 가기 위해 더 빨리 집을 나섰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학교에 도착하고 싶었다. 중학교하고 집하고는 약 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그 때는 그 정도 거리는 보통 걸어 다녔고 형편이 나은 학생들은 자전걸 타고 다녔다.

 그 날은 학교 수업이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마친 날이었다. 대문을 열고 아버지께서 이른 퇴근을 하셨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큰 키로 대문을 들어서면서 낯선 새 자전거를 아기 걸음마를 시키듯이 조심조심 안고 오셨다. 아버지는 거의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으실 정도로 아주 큰 키였다. 그 큰 키에도 자전거를 못 타셨기에 나는 속으로 아버지를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탈 줄 아는데 아버지는 어른인데다가 키도 큰데 못 탄다며 어린 마음에 은근히 무시하며 뻐기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전거 타는 방법을 새로 배우시려고 그러나? 갑자기 새 자전거를 왜 사오셨을까? 왈칵 궁금증이 일었다.

 번쩍번쩍하는 새 자전거에 이미 내 눈은 고정되고 말았다. 그 때 한창 유행하던 최신형 자전거, 제일 튼튼하고 좋다는 삼천리 자전거는 내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새 자전거를 눈이 부신 듯 바라보고만 있는데, 내가 태어나고 처음 보는 듯한 환한 얼굴의 아버지께서,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자전거는 내 자전거라고 선언을 하셨다.

 상상도 못하던 새 자전거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분명 아버지는 그리 말씀하셨다. 새 자전거를 만지작거리던 내 등 뒤로 느껴지던 아버지의 외눈과 내 눈길이 순간 마주쳤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차갑고 살벌하던 아버지의 눈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학교를 좀 더 일찍 가서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돼야지. 인자는 학생회장인데….

그 말씀만 하시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나와 새 자전거를 건너다보시던 아버지의 외눈 빛. 그 날 여느 아버지들의 온전한 두 눈빛보다 아버지의 외눈 빛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그렇게도 맵고 독하던 아버지의 담배연기가, 그 날은 하얀 뭉게구름 같이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그 날 이후로 아버지의 약주 드시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주량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웃는 모습의 아버지 얼굴은 참 평화로워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자전거를 닦아 놓고 출근하시곤 했다. 꼭 이맘 때였다. 경주의 벚꽃나무들은 마치 내가 학생회장이 되고 새 자전거가 생긴 걸 축복이라도 하듯 송이송이 축포처럼 터뜨려 주던 계절이었다. 벚꽃이 화동들처럼 도열한 길을 씽씽 달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했다.

 그러나 한껏 부풀었던 내 기분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무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다 본 마당에는 간밤에 분명히, 잘 세워 둔 내 자전거가 안 보였다. 혹시 오빠들이 탔었냐고 물어보니 아무도 안탔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오빠들은 어젯밤 집에서 잤는데 셋째오빠만 안 보인다. 불길했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셋째오빠는 우리 집에 얼마간의 돈이 있으면 정말이지 귀신같이 돈 냄새를 잘 맡았고, 장롱 깊숙이 숨겨둬도 그건 이미 셋째오빠 수중에 든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집 안 어디에 꽁꽁 숨겨둬도 오빠는 완벽하게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가져 간 돈으로 서울이며 대전으로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주머니에 돈이 다 떨어지면, 부모님이 안 계시는 시간을 돈 냄새 맡듯이 잘 알고 찾아들어서는 날 더러 밥을 차려 달라고 했다. 엄마는 도둑 괘내기처럼 기어든다고도 했고, 쥐새끼 같이 기어든다고도 했다.

 

 그런 오빠가 어젯밤 집에 안 왔고 새 자전거, 내 자전거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주 불길하고 우울한 징조였다. 천둥번개가 치면 곧 비가 올 거라는 확실한 증거와도 같은 일이었다. 아침상을 받고 엄마도 아버지도, 다른 오빠들도 말을 삼가며 밥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밥을 먹었지만 밥이 어디로 넘어갔는지 배도 부르지 않았다.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었지만 그 누구도 결론을 선언하기 싫어서였다.

다른 거는 몰라도 어찌 그 자전거를 감히…

 억울하고 야속하여 피가 나도록 셋째오빠를 꼬집어 비틀어주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날, 다른 날보다 힘이 빠진 모습으로 걸어서 학교에 간 나를 보고 친구들은 그 멋진 새 자전거 어떡하고 걸어왔냐고 물었고 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깜빡 잊고 집 앞에 잠깐 세워 뒀는데 누가 훔쳐 가 버렸다고, 새빨갛게 내 가슴이 타 버릴 것 같은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꼭꼭 씹어 입 밖으로 밀어내면서 얼마나 울고 싶었는지 아마 친구들은 모를 거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셋째오빠는 집에 안 들어왔다. 아버지는 그 전보다 약주를 더 많이 드셨다. 요 며칠 동안이나마 되찾은 웃음까지도 싸악 거두어 버리셨다. 새 자전거를 사 들고 오시던 그날의 환한 아버지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폭발할 것만 같은 침묵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집안 분위기가 어색하게 익숙해질 무렵, 셋째오빠는 정말 쥐새끼같이 한 밤중에 살금살금 기어들었다. 한쪽 시력을 잃고 난 다음, 온전한 두 눈을 가진 사람들보다 청각신경이 마치 초정밀 감지기가 작동하는 것 같이 발달한 아버지가 그 쥐새끼를 놓치실 리 없지. 아버지 귀는 마치 박쥐처럼 세밀하고 정확했다.

 

 한밤중에 매 타작은 시작됐고 그 날 밤 셋째오빠는 안 죽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았다. 엄마도 다른 오빠들도 성난 아버지를 말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외눈에서는 노기 띤 푸른빛이 활활 타 눈 밖으로 뚝 뚝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뼈마디가 굵고 억센 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장작개비는 단숨에 부러졌고, 오빠의 비명은 울을 넘어갔다. 어둠이 짙게 내린 대문 밖이 수런거렸지만 아무도 대문을 열어 줄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무서운 서슬에 그 누구도 감히 마당을 가로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 새 자전거를 팔아 그 돈으로 며칠 유흥비로 쓴 셋째오빠가 아버지하고 같이 때려 주고 싶도록 미웠지만, 아버지의 매타작이 심해질수록 불안했고, 불쌍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그냥 학교에 잘 다니면서 부모님의 착한 아들이면 좋을 텐데, 저렇게 맞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럭 겁이 났다.

“으윽....으으윽....헉”

 오빠가 고통 중에 흘리는 신음소리는, 아버지께서 매를 휘두르며 내시던 거친 숨소리와 뒤엉겨 온 방안을 굴러 다녔다.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도,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몽둥이를 마당으로 휙~집어 던지시더니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바지랑대가 빨래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픽 넘어지듯 아버지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봄이라고는 해도 밤기운은 찼다. 그런데도 아버지 등에서는 아지랑이처럼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오랜 시간을 아버지는 노여움을 발산했고, 셋째오빠는 도망도 안가고 말려주는 사람 없이 그 엄청난 매를 운명처럼 다 맞아냈다.

 

 중간 중간 보다 못한 엄마나 다른 오빠들이 아버지를 말리러 다가섰다가 아버지가 쳐 둔 단호한 저지선 앞에서 맥없이 나동그라지곤 했다. 입을 앙 다물고 매질만 하던 아버지는 그 자전거가 어떤 자전건데 이 눔아, 니가 감히…. 이 눔아 니가 인간이가 이 눔아….그 말만 되풀이 하셨다. 그 말끝에는 더 심한 매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악에 받쳐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셨다.

 늘 무서운 얼굴의 아버지셨지만, 그날 아버지의 얼굴은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셨다. 셋째오빠는 별 저항 없이 고스란히 그 매를 받아내고 있었다. 가끔가다 윽…. 윽…. 고통을 참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흘릴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장정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매를 맞은 오빠는 상처 입은 한 마리 들짐승처럼 방 한쪽 구석에 신음 소리만 억누르며 웅크리고 있었다.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더라면 죽은 줄로 착각 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영원히 정지된 듯한 그 시간을 깬 사람은 엄마였다.

이 눔아….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하지 그 매를 다 맞았냐? 이 미련한 눔아, 으흐흑…

엄마는 흐느껴 울면서 오빠 등을 쓰다듬으며 젖은 수건으로 상처를 닦아주셨다. 터지고 째지고 피는 엉겨 있고, 옻 오른 피부처럼 부어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날 이후 셋째오빠는 며칠을 앓아누웠고, 그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는 셋째오빠가 좀 어떠냐고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다.

 엄마만 오빠가 앓아누운 방을 아버지 눈치 봐 가면서 바삐 들락거리느라 작은 몸이 더 작아 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피멍이 어느 정도 사그라질 무렵 온다간다 말도 없이 셋째오빠는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전거가 없어지고 난 다음 아버지의 주량이나 횟수는 더 늘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 예전처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걸어가는 동안 내내 셋째오빠가 야속했고, 새 자전거가 아까웠고 걷는 게 억울했다. 어린 시절 햇살에 비춰보며 아껴 놀던 색색의 유리구슬 상자를 통째로 시멘트 바닥에 쏟아버린 날의 그것 하고는 다른 아픔이었다.

  다른 거는 다 몰라도 아버지께서 내가 학생회장이 된 기념으로 최초로 사 주신 선물인데, 그것도 술까지 줄이시면서 사 주신 선물인데 그걸 팔아 먹냐? 이 나쁜 오빠야….

 셋째오빠의 마음을 들쑤시는 건 아마도 손톱만한 악마가 그 속에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집에서는 그 누구도 내 자전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가끔 술을 과하게 드신 아버지는 이 느무 시키, 이 느무 시키, 그 말만 넋두리처럼 하셨다.

 그 사건이 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한쪽 눈을 잃으시고 세상 밖으로 나오시기보다는 혼자만의 세상에서 은둔자처럼 사셨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친구삼아 타협도 소통도 없이, 아버지는 철옹성 같은 혼자만의 성채에서 안주하셨다.

 암이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아버지는 좌절하기보다는 순종하는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더는 반쪽 세상을 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외로운 여행을 떠나가셨다.

 아버지는 가족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고백을 딸한테만은 하고 돌아가셨다. 고향을 떠나서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를 다닌 딸이 안부편지를 보내면, 그림을 그리듯이 정성스러운 붓글씨체로 답장을 보내주셨다.

 숙아 보아라로 시작한 편지에는 늘 건강하라고 하셨고, 언제 집에 올 수 있는지 궁금해 하셨다. 너를 보내 놓고 많이 미안했었다며 아버지로써는 참 하기 힘들었을 고백을 하셨다. 못난 애비를 용서하라던 그 말씀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혔다. 몇 월 며칠 경주에서 못난 애비가 그렇게 끝낸 아버지의 편지는 연필로 꼭꼭 눌러 썼고, 중간 중간 침을 바르고 이어 쓴 부분이 보였는데, 그건 어쩌면 아버지가 흘리셨던 눈물이 마른 흔적이었을까?

 

 가정을 돌보는 일보다는 자신의 불행의 늪에 갇혀 살던 아버지를 참 많이도 원망하며 살았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고향을 떠나며 다시는 아버지를 안 보고 살 거라는 어리석은 마음도 가졌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구멍이 숭숭 난 가정보다는 비바람을 맞더라도 허허벌판에서 자생하는 쪽을 택했다.

 고향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는 아버지를 떠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아버지만 안 보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우리가족이 힘들었던 만큼 아버지도 참 힘들게 사셨구나 싶어 미움보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점점 커져갔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이 커졌을 때에는 아쉽게도 아버지가 우리하고 같이 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셋째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늦은 결혼을 했고 역마살도 잠재웠다. 그런데 내 자전거는 언제쯤 변상해 줄 수 있는지, 기회 봐서 조용히 그 때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싶기도 하다.

 난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셋째 오빠는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인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걸어서 학교 다니던 그 길에, 올해도 어김없이 하얗게 벚꽃비가 내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