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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풍경


BY 새봄 2012-03-26

*

하늘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날 춘천으로 떠나기 위해 가방을 쌌다.

비가 온다는 예고를 들었으니 연주황색 접이 우산을 넣었고,

얇은 책과 얇은 수첩을 챙겼고, 진한 녹차를 물병에 담았다.

칫솔과 기본 화장품도. 추울지 모르니까 정사각형 숄도 잊지 말고 넣었다.

춘천 외삼촌댁엔 내가 유일하게 여행을 가는 곳이다.

내 고향이기도 하고, 언제나 조용하면서 먹을 걸 아낌없이 주는 외숙모가 있기에

한 달에 한번 정도 춘천여행을 계획하고 떠나게 되었다.

아무리 외삼촌이 딸처럼 나를 좋아해도 외숙모가 싫어하면 갈 수가 없었을 텐데

이런 외숙모가 있다는 건 내겐 축복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은 춘천외각에 냇물이 흐르는 시골이기도 하면서

외숙모가 꽃을 좋아해서 너른 마당에 잔디와 꽃이 흐드러진 곳이라

직장을 안다니고 쉬고 싶을 땐 일박이일 일정으로 가방을 챙기게 된다.

 

**

일산에서 춘천까지 가는 버스는 한두 시간 만에 한 번씩 있다.

1250분행 버스엔 제법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앉는 좌석에 한사람씩 쭉 앉아있다.

나도 내 자리 번호를 무시하고 아무도 없는 자리에 앉았다.

도시를 벗어나면서 엠피쓰리를 꺼내 음악을 들었다.

엠피쓰리에는 슈퍼스타케이에서 히트 친 음악들이 많다.

그 중에서 난 허각과 투개월에게 문자투표도 했었다.

흐리지만 봄날의 따스한 온기가 얼굴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춘천 가는 길은 북한강을 끼고 올라가게 된다.

젊은 날, 힘들고 지칠 때 춘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었다.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산 아래 강마을과 강을 따라 휘휘 도는 오솔길을 보며

무상무념에 나를 내려놓곤 했었다.

춘천역에 내려 소양강행 버스를 타고 소양강댐에 올라서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타고 또 똑같이 차창을 내려다보다가

집으로 오면 잠시 동안 방황했던 이성간의 갈등도 일에 대한 고달픔도

가난에 대한 슬픔도 옷에 묻은 먼지 털 듯 훌훌 털어버리곤 했었다.

이젠 그런 갈등은 없다. 사랑도 일터도 돈도 내 것이 아니면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건 몸부림쳐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중년이 된 나는 친척 만나는 것이 반갑고 시골에 마음이 당겨서 가는 것이다.

3월 중순의 경춘선 도로는 겨울 낯빛과 비슷하지만

느낌은 벌써 봄꽃 축제를 보러 가는 것 같다.

버스는 빠르게 달려가지만 멀리 산들은 느리게 지나간다.

그 풍경을 집착 없이 바라보게 된다.

될 인연은 힘들게 집착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듯이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는 인연이라면

그냥 놓아두는 것이 치사하지 않으면서 야금야금 다 먹은 식빵봉지처럼 가벼워진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오류와 낭비와 욕심 속에 살아가게 된다.

춘천행 기차나 버스를 타면 이 모든 것에 홀가분해진다.

봄비가 차창에 이슬처럼 묻어난다.

햇볕이 나면 가붓하게 날아가는 이슬처럼 봄비가 흩뿌리듯 내린다.

 

***

춘천 터미널에 도착하니 비는 그쳐있었다.

친정엄마와 발산동이모(넷째이모)는 조금 늦어진 다고해서

원주이모(둘째이모)를 만나 외삼촌댁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춘천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 우리가 내릴 곳을 친절하게 전광판으로 알려주어서

당황하지 않고 내릴 수 있었다.

시골도시지만 일산보다 더 현대화가 되어 있다.

칸막이처럼 답답한 아파트는 없고

야트막한 주택으로 주욱 이어진 마을을 지나면 냇가가 나온다.

냇가 다리를 건너 300미터쯤 신작로 길을 따라가면

과실나무와 예쁜 돌이 많은 목적지 외삼촌집이 있다.

나 혼자라면 조금 돌더라고 냇가 둑길로 걸어가겠지만

여든이 다 된 원주이모를 위해 편편한 길로 이런저런 일상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갈림길 사거리에서 원주이모는 언덕을 가리키며 저 집이라고 한다.

나는 전혀 엉뚱한 집을 외삼촌집이라고 우기시는 이모 말에 깜짝 웃어야했다.

몇 번을 전나무 있는 저 집이 맞는다고 우기시기에

그럼 이모는 그쪽으로 가고 나는 우측 길로 간다며 나중에 만나자고 했더니

맞는 것 같은데...아닌가? 하시며 내 뒤로 물러서며 오신다.

조쪽 집엔 꽈리열매가 호롱불을 밝힌 것처럼 은은했고,

요쪽 집엔 채송화 꽃이 지천이라 얻어다 외삼촌 아래 마당에 심었었고,

이쪽 집 울타리에 씨 떨어져 아무렇게나 자란 해바라기가 많아

슬쩍해서 외삼촌 윗마당에 심은 적이 있다고 이모에게 설명을 하니

그제야 내가 가는 길을 따라 바쁘게 걸어오셨다.

조오기...댕기가(개이름) 우리를 알아보고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외숙모에게 원주이모가 집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상황을 설명하니

외숙모는 바람소리같이 시원하게 웃었다.

거실 난로에선 장작불이 타닥 탁탁탁 불꽃을 일으키며 시원하게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