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198

산에 간 김에 물도


BY 이안 2011-11-09

산에 한 번 다녀볼까?

가을은 가을인가보다. 얼마 전부터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오더니 결국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 작은 가방에 물통을 주섬주섬 넣어 짊어진 다음 집을 나섰다.

 가다보니 아파트 단지 내 단풍이 곱다. 공작단풍이 가을 색으로 완전히 갈아입었다.

내 집과 공원, 늘 다니던 길만 맴맴 돌다보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아름다운 가을이 손님으로 와 머물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았다. 내일은 카메라를 들고 단지를 돌며 아름다운 가을을 담아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산쪽으로 옮긴다.

유달리 겁이 많은 난 산길로 들어서면서 연신 주변을 살핀다. 매스컴에 중독된 내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돼버린 건 당연하다. 날이면 날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비보를 접하고 살다보니 낯선 타인, 아니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는 필요악이 돼버린 지도 오래다. 그럴 때만 난 남자로 변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남자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자유를 여자보다 더 받고 태어난 족속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여자로 태어난 걸 한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다. 여자로 태어난 게 천만 다행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조선시대가 아니다. 여자들이 활개를 치고 당당히 살아내고 있는 20세기다. 20세기 남자로 태어난 것보다 여자로 태어난 게 백 번 생각해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를 걸어가자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 가늠하기 힘든 농꾼을 만났다. 난 광불사라는 절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지 묻는다. 아저씬 한참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난 그곳에 가면 약수가 있냐고 다시 묻는다. 아저씬 약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신 계곡에 호수를 연결하여 나오는 물은 있다고 말한다.

약수가 아니라는 말에 난 좀 실망한다. 그래도 운동 삼아 나선 길이니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난 이상기온으로 초여름 같은 11월의 한낮에 한 발 한 발 산으로 옮긴다.

길 한쪽으로는 건물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사람 사는 주택이 있다는 것이 다소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게 한다. 그러면서도 한 편에선 산허리를 잘라내고 지은 집들이 마냥 곱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산비탈길로 들어서는데 젊은 여자 둘이 내려온다. 난 그들에게 절에 가려면 얼마를 가야 하냐고 묻는다. 그들은 한 200m 정도 가면 된다고 말한다. 좀 경사가 가파르긴 하지만 좀만 가면 된단다. 내가 경사가 그렇게 가팔라요? 하고 묻자, 혹시 내가 돌아서기라도 할까봐 그런지, ‘에이 좀만 가면 돼요.’ 한다. 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오른다.

경사가 가파르긴 가파르다. 45도 각도는 너끈히 될 거 같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한 때는 여기저기 등산도 곧잘 다녔던 경험이 있는 내가 아닌가. 10여 년 운동으로 단련된 내 다리가 있지 않은가. 그 정도로 헉헉거릴 난 아니다.

공원 핼스 자전거 거꾸로 타기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가는 내 다리가 좀 무겁긴 했지만 가다가 주저앉을 만큼은 아니다.

물소리가 들린다. 20~30평 넓이의 공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 끝에서 물이 연신 호수 밖으로 흘러나온다. 아저씨 한 분이 하신길인지 텁텁한 입을 헹구어내고 있다. 난 아저씨에게 마셔도 되는 물이냐고 묻는다. 주변 계곡이 내가 생각한 계곡이 아니다. 그는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등산객들이 늘 마시고 간다고 말한다. 절이 없다고 말하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헐어버렸다고 말한다.

호수는 벽돌에 구멍을 뚫은 다음 끼워서 고정을 시켜놓았다. 그리고 고무통 두 개를 상하로 땅에 묻어 물을 받아내고 흘려보내게 해 놓았다. 한쪽에는 나뭇가지를 꺾어 고무통 테두리에 구멍을 뚫고 꽂은 다음 가지에 바가지를 서너 개 걸어놓았다. 등산객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누군가의 소박한 배려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통에서 찰랑거리는 물에 손을 팔뚝까지 담가본다. 시원하다. 물도 흘러 버려지는 게 아까울 정도로 깨끗하다.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물을 받아 마신다. 그냥 물맛이다. 짠맛도 쓴맛도, 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는 물이 좋은 물이라고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난 통에 물을 가득가득 담아 다시 가방에 쟁인다. 제법 묵직하다. 난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 아저씨에게 천천히 내려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내려오면서 난 내가 살기 좋은 동네에 둥지를 틀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과 내와 바다가 어우러진 아늑한 둥지.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리라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