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했다.. 잘했어… 수고했어.... 엄마 곁에 있음 이제 괜찮을 거야….”
그림자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돌아 간 작은방 손님과 어머니.
하룻 밤 꿈처럼 다녀간 두 사람이 한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에
나는 연신 ‘잘 했다’는 말만 연거푸 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사히 가서 고맙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일 게다.
“이 선생님!!! 버나비 병원인데요. 저 좀 도와주세요!!! 꼭 도와주셔야 해요!!”
무엇을 어떻게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할만큼 다급한 목소리에
교통사고가 났구나… 생각했다.
박선생님이 전한 대강 줄거리는, 한국 여학생이 홈스테이를 하고 있던 필리핀 집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집을 옮기겠다는 말에 앙심을 품고 정신이상으로 경찰에 신고해서
정신병원 응급실로 보냈다는 것이 요지.
울컥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떤 외국놈이 한국 여학생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밥부터 얹어 놓고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걱정 하던 중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00 선생님이십니까? 여기 학교인데요, 주소가 W 7th 맞습니까? 지금 정미 학생
홈스테이 집에 가서 짐을 챙겨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자기소개도 없이 우리 집 주소를 알려 달라는 남자, 더구나 여학생을 데리고 있단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 예, 저는 밴쿠버주재 영사관 강모 영사라고 합니다.”
통역하는 분의 말도 채 파악할 시간도 없었는데, 이번엔 영사관이라는 걸 보면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라곤 억울한 일을 당하는 한국 여학생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부였다.
종일 굶었을 아이를 위해 쇠고기를 갈아 야채죽을 끓였다.
5시, 드디어 정문 앞에 도착했다는 인터폰이 울렸다.
대형 가방을 세 개나 끌고 온 두 남자와 함께 서 있는 여학생.
핏기 없는 핼쓱한 얼굴이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여린 몸에 자그마한 키.
그 큰 가방들을 한국에서 어떻게 끌고 왔는 지 의심스럽기만 한 아이는
인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람처럼 현관으로 들어섰다.
“힘들었죠? 이제 마음 푹 놓고 우선 밥부터 좀 먹으까? 아님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할까??”
밥을 먹겠다고 한 아이는 힘없이 먹는 시늉만 하곤 수저를 놓아버린다.
식탁에 앉혀도, 침대에 뉘여도 따라 할 뿐, 말도 표정도 없었다.
영사관 직원은 나를 어떻게 소개받았는지 자꾸만 남편이 ‘목사냐’고 묻곤
이 일에 대한 설명은 꺼리는 눈치였다. 테라스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들어온 또 다른 사람은
한국에서 엄마가 캐나다로 출발했다며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일어섰다.
엄마가 왜 오시지? 한국 갈 거면 혼자 왔던 것 처럼 혼자 가도 될텐데….
점점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지만
웬지 아무것도 물어선 안될 것 같은 분위기에 서울로 전송할 원고를 마무리 하고 있었지만
썼던 줄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며 집중하지 못했다.
문득, 새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다가 온 아이가 내가 쓰고 있던 원고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웃으며 모니터를 아이쪽으로 돌렸다. 보고 싶으면 보란 듯이…..
홈스테이 가족들이 방에 들어와 가방을 뒤지고 물건을 몽땅 꺼내 놓기도 해서
옮기겠다고 했더니 태도가 돌변해서 학교를 가려는데
경찰을 불러 정신병원으로 보냈다는 것.
“영사님께 말하지!!! 아니! 내가 가서 혼내줄까?”
아이의 두 손은 아직 진정되지 않은듯 가볍게 떨린다.
‘걱정 마… 안심해 이제…. 걱정 마....\' 안심시키자
병원으로 가는 동안 100만원이 넘게 들어 있던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가족들이 모이면 영어 못한다고 흉을 보더라며 분노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득 문득 그림자처럼 다가와 곁에 서 있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엄마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주었다.
이유는 몰라도 웬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얼마 후 조카와 친구의 딸, 남편이 연이어 귀가를 할 때마다
‘인사해. 정미인데 오늘 하루 우리 집에서 묵고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하면
예고없는 손님에 궁금할텐데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린 모두 거실에서 각자 컴퓨터를 놓고 조카는 숙제를 하고, 남편은 영화를 보고
친구 딸은 공부를 하고 나는 원고 정리를 하고...
아이는 여전히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방과 거실을 소리없이 오가며
간간이 뜬금없는 질문을 할 때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돌아가며 답을 해주고 있었다.
차츰 안정되는 듯 해서, 죽을 한 번 더 먹인 다음 혹시 먹는 약이 있는지 물었다.
꺼내 온 약이 한웅큼이다. 1회 복용량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아버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애가 성격이 좀 소심해서 그렇지 아무렇지 않아요. 약간 우울증이 있긴 하지만 ……….”
아이가 보는 앞에서 질문을 할 수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이상없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내 짐작에 확신을 주었다.
“혹시 내 가방 뒤졌어요?”
아이는 약 먹을 물을 건네는 내게 가방을 뒤졌냐고 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 네 가방은 저기 있는데 걱정되면 방안으로 가져다 줄까?”
가방을 방안으로 들여 놓고 다시 일을 하는데 영화를 보고 있던 남편에게 와서 시끄럽다며 끄라고 한다.
“그럼 이어폰을 끼면 될까?”
아이가 빙긋이 웃었다. 허락한다는 표현 같았다.
“그런데 지금 필리핀 홈스테이 아줌마가 나 흉본 거 녹음해 줘서 듣는 거에요?”
“아니, 이건 미국 영화인데 여자 셋이 사는 이야기야. 영어 공부도 할 겸 너도 함께 볼래?”
이런 대화가
우리는 각자 컴퓨터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마저 최대한 가족끼리 대화를 자제했다.
그러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아이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다.
누군가 아이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충동질하며 아이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신발도 감췄다.
혹여 내가 깜빡 잠든 사이에 나갈까봐 베란다 문도 잠궜다.
불을 끄면 잘까 해서 불도 껐지만 한 숨도 자지 않는 아이가 어둠 속에서
내게 생리대와 바지를 달라고 해서 찾아주고 다시 잠자리를 봐주고…
베란다 문을 열면 따라가서 닫고 데리고 들어오며 밤을 새웠다.
엄마 생각이 났다. 얼마나 힘들까…. 너무 애처롭고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간혹 정신이 돌아온 아이가 ‘자기가 좀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다.
“아니, 아직 시차 적응이 안되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 거야. 곧 괜찮아 질거야…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괜찮다... 괜찮다.... 생각하며 숨을 크게 쉬어 봐~ ”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약이 독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가 봐요.”
스스로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아이는 현실과 상상을 혼돈하는 증세였다.
자신의 상상이 실제로 일어 나고 있다는 착각… 망상이었다.
잠깐씩 정신이 돌아올 땐 자기 이야기도 짧게 들려줬다. 숙명여대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고
일어(日語) 에는 자신있다고 할 때는 여느 대학원생 못지 않은 초롱함도 엿보였다.
밤을 그렇게 보낸 다음날 오전
나는 영사에게 발칵 화를 냈다.
부모가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을, 민간인에게 보호를 맡긴 것도 그렇지만
어제 알고 있었음에도 환자에 대한 일말의 정보를 주지 않고 가버린 것에 대해서였다
그래서 갑자기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전혀 대비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 당했다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그쪽에선 오히려 놀랬다. 통역 박선생님이 상황설명을 당연히 했다고 생각했다는 것.
세상의 모든 어머니, 엄마는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다.
유학간 딸이 정신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 오며
엄마는 밤새 국제선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초조하고 힘들었을까.
짭짤하게 된장찌개를 끓여 밥을 차렸지만 엄마도 그 딸처럼 한 술도 뜨지 못한 채 물만 마셨다.
모녀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엄마의 존재감만으로도 딸의 눈빛은 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품고 앉은 어미 닭 마냥
딸을 품에서 떼어놓지 못하던 엄마. 엄마는 딸의 병을 익히 알고 있을 터,,,,,
되새기게 하는 것도 상처가 될 듯하여 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린 또 다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엄마를 대했다.
배웅을 하기 위해 따라 나선 내게 어떻게든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하던 엄마는
고생했다며 돈을 주고 싶어 했지만, 우린 부자라며 자동차 문을 억지로 닫았다.
1박2일, 아이와 엄마가 머물고 간 작은 방에는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밥 한 숟갈 뜨지 못한 채
정물처럼 앉아 있는 아이를 품고 있던 엄마의 슬픈, 그러나 안도하는 기쁨이
그림처럼 아른 거린다. 창문을 활짝 열어 햇살을 방안 가득 채우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이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여학생의 말이 사실인줄 알었습니다.
통역 인생 20년 만에 처음 있던 일입니다. 제가 정말 큰 실수를 했습니다. “
통역관 박선생님이었다. 돌볼 수 있어서 더 큰 축복이었노라고 겨우 달래고 있을 무렵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영사관이었다.
“이선생님 아니었으면 두 분이 오늘 한국행 비행기를 타실 수 없었고 아주 어려웠을 겁니다.
도와주셔서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 환자는 일정기간 비행기를 탈수가 없습니다. 기내에서 발작과 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검사와 전문가의 확인절차와 기간이 필요하고 공관에서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하던 일인데 입원 시키지 않도록 돌봐주셔서 모든게 순조로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도움이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 주고 싶다고 어디 그게 내 뜻대로 되는 일인가.
진심으로 나는 그런 기회를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없는 열심은 오만함이란 걸 알기에, 감사하다는 내 마음이 진심이란 걸 열심히 피력했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엄마 곁에서 빨리 치유하고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처녀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