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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금 털리던 날


BY 그대향기 2010-12-27

 

 

여러 날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일을 실행에 옮기던 날.

축복처럼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까지 내려줬다.

남쪽지방에서는 참 보기 드문 눈인데

새벽 잠이 덜 깬 내 눈에 옥상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소리도 없이 나비처럼 눈이 내렸구나....

 

올해 대학수능시험을 본 막내도 있고

내년에 복학을 해야하는 둘째도 있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짧은 머리로 또 고민을 했었다.

과연 김치냉장고를 꼭 들여놔야 할까?

지금 냉장고도 결코 적은 용량은 아닌데

굳이 무리를 해 가면서 김치 냉장고를 들여놔야 할까?

 

혼자서 주방을 들여다봤다가

거실이며 집 전체를 요리조리 뜯어봤다가

아이들 학비며 생활비를 조목조목 적어보다가를 몇번 몇날....

그래도 ....

학비며 들어갈 공과금이 버겁더라도

아무리 그렇다치더라도 이건 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이 먹어야 하는 건강식품도 많이 늘었고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따로 보관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 동안은 우리집 냉장고 한켠 구석마다에

남편이 먹어야 하는 건강식품이며

사과며 파프리카등을 비닐팩에 담아서

김치랑 다른 반찬과 함께 보관했었다.

 

그러다보니 냉장고를 열 때 마다 반찬 냄새며 김치 냄새가 나서

환이나 과일에 원치 않는 냄새가 배여들기 일쑤고

수시로 약을  먹기 위해 냉장고를 여닫는 남편한테

가뜩이나 냉장고 정리가 잘 안되는 내가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하던지.

내가 일일이 챙겨 줄 짬이 안나면 혼자서 찾아 먹는 남편인데

반찬냄새며 김치냄새가 가득 든 약이나 과일을 먹게 하다니...

 

그 동안 전자제품을 파는 무슨무슨 랜드니 하는

대형매장 앞을 지나칠 때면 가격을 슬쩍슬쩍 곁눈질했었다.

얼마나 모아야 살 수 있을까?

가정경제에 금이 안가면서 김치냉장고를 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자.

김치냉장고는 내게 분명 목돈이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남편한테 손 안 벌리고 애들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 여유를 만들기에 돌입.

 

그러기를 2년여.

큰 행사를 마치면 따로 생기는 특별 보너스며

명절 보너스 그리고 휴가비 아낀 돈에 남편 바지 세탁할 때

알뜰히 안 털어내고 일부러 슬쩍 넣어 두는 잔돈 몇푼까지.

닥닥 긁어 모았고 절대로 돈 냄새를 안 풍기며 악착을 떨었다.

내 월급이야 남편 통장으로 같이 들어오니 내가 아예 모르는 일이고

가계부는 남편 손에 넘긴지 오래다.

 

아이들 학비며 생활비며 수많은 공과금을 납기일에 챙긴다는게

내겐 너무 벅찬 일이고 골치가 아픈일이라

일찌감치 주부임을 포기하고 남편한테 그 모든 업무를 다 떠 넘겨버렸다.

그리곤 가정경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편하기도 하지만 아쉬울 때도 많은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금전적으로 엄한 남편은 아니지만

뻔한 월급에 월말이면 요리조리 뚫어진 구멍을 메울 남편인지라

꼭 필요한 돈이 아니면 조르지도 않고 헤프게 쓸 돈도 솔직히 없다.

 

그런데

남편은 그저께부터 이번 달은 상여금이 나오는 달인데도 유난히 난색을 표했다.

월말이 아니라 년말이다보니 더 많이 더 큰 구멍들이 있었나 보다.

남편의 깨끗한 건강식품을 위해

남편만을 위한 건강 냉장고를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2년 여를 악착같이 푼돈을 모았었는데

순간 갈등이 생겼다.

이 돈으로 김치냉장고를 정말 사고 싶었는데

저렇게 결제할 일이 많은데 김치냉장고를 꼭 사야 할까?

 

낮에 잠깐 매장에 들러서 구경만 한다고 둘러 본 김치냉장고

그 훤하고 화려하고  칸칸마다 냉기가 따로따로 나온다던 그 멋진 김치냉장고

아래 윗칸 따로따로 식품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보관할 수 있었던 김치냉장고

유난히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내년 여름까지도

잘 숙성된 김치를 맛있게 보관 할 수 있다던 김치냉장고

종업원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생생하게 눈 앞을 오락가락 떠 오르는 김치냉장고를 어이할까?

 

남편한테 김치냉장고를 산다면 분명히 거절을 할거다.

가족을 위한   김치냉장고도 아니고 본인만을 위한 김치냉장고라면 더더욱.

그러나 난 꼭 김치냉장고를 사고 싶었다.

아니 꼭 남편한테 선물하고 싶었다.

몇번이나 큰 일을 당했던 남편의 건강을 지키고 싶었고 이왕이면 신선하게

이왕이면 남편만을 위한 공간에서 만족한 섭생이 되도록 해 주고 싶었다.

 

아직까지 보통 냉장고 하나로 잘 살고 있지만

목적이 있어서 모은 돈이었고 나만이 아는 비상금이질 않은가.

그런데 지금 당장 결제할 일이 많다는 남편을 어찌 모른척 할까가 고민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어찌어찌 보너스달마다  조금씩 메꾸어가는 실정이지만

당장 김치냉장고 살 돈이 내 수중에 있는데 급한 일부터  정리하고 싶기도 하다.

아~

갈등 생기는 일이다.

주머니돈이 쌈짓돈인데 뭘....

 

어젯 밤

잠자리에 든 남편한테 거래를 하기로 했다.

\"2년 동안 푼돈 모은건데 김치냉장고 살 돈  다 줄테니까 나한테 김치냉장고 할부로 사 줄래요?

 김치냉장고 살 돈으로 우선 급한 일 처리하고

 거의  16년동안 안 긁은 카드로 한번 긁자구.

 우리 카드 긁어지나 안 긁어지나 확인도 해 볼겸.

 어때요?\"

뜻밖의 내 제의에 어안이 벙~벙~놀라서 커 진 남편의 두 눈.

\"언제 그 많은 돈 다 모았어?

 어째  죽어라고 보너스 챙기더니..

 대단해.

 그럼 내일 매장가서 다시 한번 보고 카드 한번 긁어 볼까?

 고마워 당신.

 나중에 회복되면 꼭 되갚아 줄께.

 그 돈이 어떤 돈인데...ㅎㅎㅎㅎ

 구렁이 알 같은 돈일건데...\"

 

지난 날 한창 어려울 때 남편 월급 날만 되면

카드결제를 하느라 늘 은행을 돌고 돌았던 아픈 기억이 있어서

카드를 무슨 불덩이처럼 아주 멀리하고 살았었다.

구경만 해도 만지기만해도 데일 것 같아서.

작은 사업체를 이끌어 가던 남편의 좌절은 모든 것을 앗아갔고

남편을 송두리째 짖밟아 놓았다.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보증금도 없는 월셋방을 살면서

눈물겹게 노력해서 급한 불을 끄고도 카드발급은 않고 살았었다.

이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웬지 그 때의 후유증이랄지

카드만 보면 심한 배멀미같은 울렁증이 생기고  으슬으슬 추워지기까지 했다.

이제는 카드를 긁어도 갚아나갈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둘 다 카드는 딱 한장.

농협신용카드 한장만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구렁이 알 같은(?) 내 돈을 다 내 주고

남편은 카드로 6개월 할부를 하고 김치냉장고를 샀다.

꼭 사야하나를 놓고 몇차례나 밀고 당기는 의견충돌은 있었지만

오로지 남편을 위한 건강지킴이로 들여 놓는다는 내 말에

남편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기꺼이 승락을 했고 꿩먹고 알 먹은 남편이 되었다.

오늘 계약을 했고 내일 배달 되어 올 김치냉장고.

앞으로는 싱싱한 건강을,싱싱한 남편을 지켜 주길 바란다.

 

돈 많은 사람들 한테야 큰 돈이 아닐런지 모른다.

그러나 2년 동안 모은 내 대단한 비상금은 한입에 톡~털렸지만

남편의 건강을 싱싱하게 지켜 줄 김치냉장고를 기다리는 이 시간

한 남자의 아내로 산다는 것에 충분히 행복하다.

오래 된 그릇들만 수북한 주방에도 좀 환해 지겠지?

얼른 자야지~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