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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인생(7)] 이상한 휴가


BY KC 2010-11-30

형의 휴가는 거의 정기적이었다. 휴가가 정기적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 번의 이상한 휴가 때문이었다. 상병 때인지 병장 때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 불현듯 휴가라고 형은 집에 왔다. 다음 정기휴가일자가 아직 많이 남아 있던 어느 날 예고없이 찾아온 것이었다. 다른 휴가기간 보다 짧았던 그 휴가는 분명 이전 형의 정기휴가와는 여러모로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이전 휴가 때 사가지고 오던 선물보다 더 좋은 내용들의 선물들이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보통은 양말이며, 스웨터며, 털모자며, 여름 슬리퍼 등이 일반적인 형의 정기휴가 때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 갑작스런 휴가 때 형이 가족에게 사온 선물들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비싼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어머니를 위한 공단 옷감 한 벌과 내 선물만을 기억할 뿐 나머지 다른 가족들에게는 어떤 선물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값나가는 선물들이었다. 그 선물들은 형이 받은 포상휴가에 딸려 나온 포상금의 산물이라고 형이 말했던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 후로부터 한 참을 지난 후였다.

 

포상휴가나 포상금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나는 다만 형이 이전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었던 그러나 비싸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만화손목시계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계는 우리 지역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전학 내려온 얼굴 하얀 학생들만이 차던 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그들은 도심에서 벗어난 공단 근처에 살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장에서 멀지 않은 초록색 잔디 위에 거의 같은 모습의 집들이 그들이 살던 사택이라는 곳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구릉을 타고 드문 드문 존재하던 초라한 집들에는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친구들이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내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별개의 전혀 다른 세상으로 존재하였다. 그 세상 속의 그들은 비록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 같은 반에 속해 있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그들만의 버스로, 그들만의 세상 속으로 사라지곤 하였다. 그래서 매일 등하교길에 만나는 그들의 통학버스는 왠지 모를 위압감을 주었다. 통학버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무리지어 쏟아져 나오는 나와 전혀 다른 깨끗한 피부와 그에 걸맞는 화려한 옷가지, 익숙하지 않은 형형색색의 책가방과 필기도구, 그리고 점심시간 때나 보게되는 짙은 살색의 요염한 소시지는 분명 나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그들만이 가진 특별한 무엇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하얀 손목에서 그들의 하얀 팔과 함께 흔들리던 원색의 아름다운 만화시계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그들과 나 사이 건널 수 없는 생활수준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식처럼 여겨졌었다. 그렇게 겨우 꿈에나 그릴 수 있었던 그 만화시계를 형의 휴가 때 받았으니 그 휴가는 내게 커다란 의미일 수 밖에 없었다.

 

내 만화시계를 포함한 고가의 선물 이외에 그 휴가가 가졌던 또하나의 특별함은 외식이었다. 정기휴가를 받아 집에 온 형과 온 가족이 외식을 한 적은 기억에 없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짧은 휴가기간 동안 우리는 두 차례 온 가족이 외식을 하였다. 형 누나 졸업식이 되어야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외식을 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마 처음이 아니었나 싶은 특별한 경우였다. 그것도 갈비집에서 한 번, 불고기집에서 한 번. 특히 갈비집에서의 외식은 내게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커다란 뼈에 고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처음 보았을 뿐만 아니라 집에 올 때 우리 집 비스(어머니는 계속해서 집 작은 마당에 개를 키우셨는데 항상 그 모든 개의 이름이 비스였다)에게 여전히 양념 냄새가 배어 있는 뼈를 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휴가가 여느 휴가와 달랐던 마지막은 형이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날의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새벽을 가르며 식구 모두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아버지 산소를 가기 위해서는 사람과 차가 함께 지나는 굴을 두 개나 끼고 걸어가야 했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에 의해 뚫어졌다고 하는 그 굴들은 비좁아 차가 한 대 정도 지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굴 중간 약 세 군데 정도에 차가 비껴갈 수 있는 조금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천정 여러군데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졌고 그 물은 얕은 웅덩이를 만들었지만 굴의 초입과 끝을 제외하고는 그 웅덩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비록 전구다마가 군데군데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컴컴하여 발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명절 때는 많은 사람이 그 굴을 걸어 성묘를 가기 때문에 무섭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날처럼 우리 가족밖에 없을 경우 우리는 그 굴 속에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굴 속에서 울리는 우리들의 노래소리가 암흑이 주는 무서움을 다소 덜어내곤 하였다. 발 아래에 전해지는 물 웅덩이보다 굴 속의 캄캄한 무서움이 더 커서 가능하면 빨리 그 굴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굴을 나온 후 바다와 접해 놓인 기찻길을 따라 또다시 포장되지 않은 일차선의 길을 얼마간 걸어가면 아버지 산소를 포함한 많은 묘지가 무분별하게 쓰인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났다. 다른 대부분의 묘지처럼 아버지의 산소에도 묘지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묘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산소는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산소 바로 뒤에 설악산 흔들바위만큼 커다란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위가 지금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우리는 늘 그 바위로 아버지 산소를 찾았으니 자연적인 묘지석이 아니었나 싶었다.

 

형의 휴가 마지막 날 아버지 산소를 찾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 때 만큼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에 이것 저것 담아 아버지를 뵈러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산소 앞에 꺼내 놓으시면서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얘기하듯 혼잣말로 인사를 하셨다. 가져간 과일이며 나물이며 꼬막이며 소주 등이 산소 앞에 놓이자 늘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만이 절을 하였다. 그런데 그 때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절을 하던 둘째 형이 서럽게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절하는 내내는 물론 심지어 절을 한 후 꼬막과 과일을 쪼개 산소 위와 주위에 던져 놓을 때 그리고 소주를 역시 산소 주위에 부을 때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명절 때 성묘를 하면 가끔은 식구들이 울기도 했지만 얼마 있다가 그치곤 하였다. 그러나 그 날 형은 매우 서럽게 울었다. 울음도 하품처럼 전염되는지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고, 식구 모두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다시 걸어야 하는 그 캄캄한 굴 속에서도 우리는 그 누구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 굴이 주었던 무서움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침울한 암흑이 우리를 감싸고 있어 무서움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형은 기차시간에 맞춰 가야 한다고 얼마 있다가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을 나서기 전 다른 휴가와 달리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렸다. 한 번도 이전의 휴가에서 그랬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절을 하면서 또 매우 서럽게 울었다.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답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주위에 있는 가족 모두가 아버지 산소에서처럼 또 한 차례 울음을 나눠가지던 중간에 형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몇 차례나 뒤돌아보았는지 모르지만 그 돌아보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형의 특별한 휴가는 끝났었다. 나는 그 휴가가 어떤 의미였는지 전혀 몰랐다. 아니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고 해 볼 나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포함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뭔가 이전 휴가와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