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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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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BY 그대향기 2010-09-30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의 햇살은 수정처럼 맑고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알알이 영근 나락 알갱이들이 낮햇살에 여물어가고

높다란 감나무 가지에는 감들이 대롱대롱 붉은 빛을 띄고 익어간다.

키 낮은 꽈리가 주홍빛으로 익어가면서 우리집 뒷뜰도 풍성해졌다.

토란대가 하늘까지 닿으려는지 자꾸만 키를 키우고 있고

새하얗던 부추꽃이 진 자리가 갈색으로 짖물러가는 초가을의 이른 아침.

 

새벽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튕기듯 일어났다.

추석에 친정엄마를 뵙고 오면서 그리는 오래 못 계실 것 같아 마음이 텅 빈 듯 했는데

친정에서 온 전환줄 알고 놀라서 수화기를 들긴했어도 잠시 주저하면서 받았다.

\"여..보..세..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혹시나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오빠 목소리가 들리까 봐 조심하면서 받았는데

\"어~최니? 나야..전...어젯밤 선생님 돌아가셨대...저녁에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만나지겠니?

 요즘도 바쁘지?

 애들한테 연락할테니 어지간하면 늦게라도 와 줘.

 선생님께서  너 많이 좋아하셨는데....\"

 

다행히(?) 중학교 때 친구한테서 온 전화였다.

중학교 은사님께서 오랜 투병생활을 마감하시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단다.

내 전화번호로 안 오고 어찌 친구한테 연락이 갔을까?

그건 나중에 병원에 가서 유족인 딸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친한 사람 전화번호는 폰에 입력이 아니라

머리로 다 암기하셨기에    연락 드리지 못한 분들이 더 많았단다.

나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는 거.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은퇴식 때 고별사를 읽게 되면서 딸하고 인사를 했었는데 사망소식을 알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던 분인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한테 대구까지 가 줄 것을 당부하고 여러 친구들한테 연락을 했다.

현직 교사들이 유난히 많은 우리 동기들이라 밤이 늦은 시각인 9시 30 분 이후라야 가능하다는

대답이 왔고 그럼 그 시각에라도 만나자고 당부를 하는 중에 서울에 사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자기는 밤 11시 30 분이라야 병원에 도착가능한데 내가 기다려 주면 내려 오고

너무 늦어서 친구들을 못 만날 것 같으면 무리해서 못올 것 같단다.

선생님을 배웅하는 길이지만 친구들이 아무도 없는 영안실에 어떻게 가냐고 그랬다.

직장이 있는 친구는 아니지만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일이 많은 그 친구는

밤 늦은 시각이지만 기다려 주는 내가 있으면 내려오고 안 그러면 힘들것 같다기에

무조건 아무리 늦게와도 기다려 줄테니 내려오라고 했다.

 

돌아가신 은사님 은퇴식 때도 그 먼 서울에서 내려 와 준 고마운 친구.

중학교 때 친구들인데 우리 동기들은 다른 중학교 동기들하고는 좀 유별나게 똘똘 뭉친다.

돌아가신 은사님께서 중학교 부임을 하시고 처음 맡은 아이들이 우리 기수였는데

친자식들처럼 알뜰히 가르치셨고 혹독하게 훈련을 한 결과 그 기수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도 많이 진학을 했고 후일에 좋은 직장도 많이 진출했지만 그 친구들의 아이들도

좋은 대학에  참 많이 진학을 해서 은사님께서는 우리 기수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국내외의 명문대를 거론하시며 우리 일보다 더 좋아하셨던 은사님.

누구 딸은 어느 대학에 의대에 갔다더라..

누구 아들은 외국의 어느 대학에 장학생으로 갔다더라....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더랬는데 젊은 나이에 너무 허망하시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첫정.

은사님의 첫정을 다 쏟으셨던 우리를 다른 학교에 가셨어도 기쁨으로 여기시며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은사님.

지방의 작은 도시 경주에서 제자들이 잘 자라줬고 그 제자들의 자식들까지

소식을 다 꿰고 계셨던 은사님.

추석전에 병원으로 가서 찾아 뵈었을 때는 이미 복수가 차서 만삭된 임산부처럼

이불이 불룩해져서 누워계셨고 얼굴빛은 벌써 누런 빛이 돌아서  오래는 못 가실 것 같았다.

제자는 너무 많은데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지 않아서 아니..거의 없다가 내가 갔을 때

부은 손으로 내 손을 부여 잡으시며 너무너무 고맙단 이야기를 몇번이나 하셨다.

그런지 며칠이 안 지나 은사님의 사망소식을 접하니 참 .......

늦은 시간에 영안실로 달려 와 준 아홉친구들이 고마웠다.

같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이며 양산 그리고 창녕.

 

얼굴은 거의 변함이 없고 나이만 들어 그 때 그시절 이야기에 은사님 이야기에 동창회를 방불케했다.

유족인 큰딸이 와서 우리에게 고맙다고 몇번이나 인사를 했다.

\"아버지께서 자주 이야기하시던 분들이 와 주셔서 아버지도 기뻐하실겁니다.

 늦은 시간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든 부족한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는 큰딸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친다.

자식교육도 잘 하시어 딸 셋을 경찰에 교사 그리고 공무원까지 다 하게 해 놓으시고

늦둥이 아들만 아직 대학생으로 남겨두고 가셨다.

40 대 중반에 일찍 혼자되시고 재혼도 없이 남자 몸으로 20년이 넘도록 사남매를 키우시느라

병을 키우신 듯 하다는 내 말에 선생님께서도 살아 계실 때 순순히 인정을 하셨었다.

교사의 크게 넉넉지 못한 봉급으로 돌보는 사람없이 사남매를 키우셨으니....

그래서 더 재혼이 어려우셨는지도 모른다.

큰재산없는 사남매 딸린  홀아비.

 

과로로 인한 혈압에 간암까지 그렇게 병을 키우셨고

은퇴식을 하시고 줄곧 병원 중환자 실에서 사시다가 그렇게 가셨다.

마지막에는 유언의 말씀 한마디도 못 하시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시어 자식들이 더 안타까워했다.

호전되는 기미가 조금 있으시다가 갑자기....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조문객들을 대하느라 파김치가 됐을 유가족들에게 줄 피로회복제며

늦은 밤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 올 친구들 피로회복제까지 넉넉하게 챙겨 나갔다.

은사님의 영정 사진 앞에서 잠시 조문을 하고 가져간 조의금이며 피로회복제를 전하고

친구들한테도  돌아 갈 시간에 맞춰서 피로회복제를 나눠줬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 한두시는 다 넘어갈건데 조심해서 돌아가고

고등학교의 교사 자리에 있는  친구들한테는  제자들에게 엄마처럼 잘 대하냐고 웃으면서 묻고

웃음으로 답하는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은사님의 조문을 마치고 돌아 온 시각이 새벽 두시.

 

늘 아내의 출입에 시간에 상관없이 기사로 대동해 주는 남편이 고맙다.

돌아가신 은사님께서도 남편을 참 좋아하셨는데....

비록 오늘 있었던 발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고통도 없고 자식들 키울 염려도 없는 그 곳에서 평안하십시오.

먼저가셔서 그립기만 하셨던 사모님 만나시고요.

저희들 선생님의 그 첫정 안 잊고 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사랑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인가 봅니다.

선생님의 제자 된 저희들 많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