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의 햇살은 수정처럼 맑고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알알이 영근 나락 알갱이들이 낮햇살에 여물어가고
높다란 감나무 가지에는 감들이 대롱대롱 붉은 빛을 띄고 익어간다.
키 낮은 꽈리가 주홍빛으로 익어가면서 우리집 뒷뜰도 풍성해졌다.
토란대가 하늘까지 닿으려는지 자꾸만 키를 키우고 있고
새하얗던 부추꽃이 진 자리가 갈색으로 짖물러가는 초가을의 이른 아침.
새벽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튕기듯 일어났다.
추석에 친정엄마를 뵙고 오면서 그리는 오래 못 계실 것 같아 마음이 텅 빈 듯 했는데
친정에서 온 전환줄 알고 놀라서 수화기를 들긴했어도 잠시 주저하면서 받았다.
\"여..보..세..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혹시나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오빠 목소리가 들리까 봐 조심하면서 받았는데
\"어~최니? 나야..전...어젯밤 선생님 돌아가셨대...저녁에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만나지겠니?
요즘도 바쁘지?
애들한테 연락할테니 어지간하면 늦게라도 와 줘.
선생님께서 너 많이 좋아하셨는데....\"
다행히(?) 중학교 때 친구한테서 온 전화였다.
중학교 은사님께서 오랜 투병생활을 마감하시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단다.
내 전화번호로 안 오고 어찌 친구한테 연락이 갔을까?
그건 나중에 병원에 가서 유족인 딸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친한 사람 전화번호는 폰에 입력이 아니라
머리로 다 암기하셨기에 연락 드리지 못한 분들이 더 많았단다.
나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는 거.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은퇴식 때 고별사를 읽게 되면서 딸하고 인사를 했었는데 사망소식을 알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던 분인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한테 대구까지 가 줄 것을 당부하고 여러 친구들한테 연락을 했다.
현직 교사들이 유난히 많은 우리 동기들이라 밤이 늦은 시각인 9시 30 분 이후라야 가능하다는
대답이 왔고 그럼 그 시각에라도 만나자고 당부를 하는 중에 서울에 사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자기는 밤 11시 30 분이라야 병원에 도착가능한데 내가 기다려 주면 내려 오고
너무 늦어서 친구들을 못 만날 것 같으면 무리해서 못올 것 같단다.
선생님을 배웅하는 길이지만 친구들이 아무도 없는 영안실에 어떻게 가냐고 그랬다.
직장이 있는 친구는 아니지만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일이 많은 그 친구는
밤 늦은 시각이지만 기다려 주는 내가 있으면 내려오고 안 그러면 힘들것 같다기에
무조건 아무리 늦게와도 기다려 줄테니 내려오라고 했다.
돌아가신 은사님 은퇴식 때도 그 먼 서울에서 내려 와 준 고마운 친구.
중학교 때 친구들인데 우리 동기들은 다른 중학교 동기들하고는 좀 유별나게 똘똘 뭉친다.
돌아가신 은사님께서 중학교 부임을 하시고 처음 맡은 아이들이 우리 기수였는데
친자식들처럼 알뜰히 가르치셨고 혹독하게 훈련을 한 결과 그 기수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도 많이 진학을 했고 후일에 좋은 직장도 많이 진출했지만 그 친구들의 아이들도
좋은 대학에 참 많이 진학을 해서 은사님께서는 우리 기수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국내외의 명문대를 거론하시며 우리 일보다 더 좋아하셨던 은사님.
누구 딸은 어느 대학에 의대에 갔다더라..
누구 아들은 외국의 어느 대학에 장학생으로 갔다더라....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더랬는데 젊은 나이에 너무 허망하시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첫정.
은사님의 첫정을 다 쏟으셨던 우리를 다른 학교에 가셨어도 기쁨으로 여기시며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은사님.
지방의 작은 도시 경주에서 제자들이 잘 자라줬고 그 제자들의 자식들까지
소식을 다 꿰고 계셨던 은사님.
추석전에 병원으로 가서 찾아 뵈었을 때는 이미 복수가 차서 만삭된 임산부처럼
이불이 불룩해져서 누워계셨고 얼굴빛은 벌써 누런 빛이 돌아서 오래는 못 가실 것 같았다.
제자는 너무 많은데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지 않아서 아니..거의 없다가 내가 갔을 때
부은 손으로 내 손을 부여 잡으시며 너무너무 고맙단 이야기를 몇번이나 하셨다.
그런지 며칠이 안 지나 은사님의 사망소식을 접하니 참 .......
늦은 시간에 영안실로 달려 와 준 아홉친구들이 고마웠다.
같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이며 양산 그리고 창녕.
얼굴은 거의 변함이 없고 나이만 들어 그 때 그시절 이야기에 은사님 이야기에 동창회를 방불케했다.
유족인 큰딸이 와서 우리에게 고맙다고 몇번이나 인사를 했다.
\"아버지께서 자주 이야기하시던 분들이 와 주셔서 아버지도 기뻐하실겁니다.
늦은 시간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든 부족한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는 큰딸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친다.
자식교육도 잘 하시어 딸 셋을 경찰에 교사 그리고 공무원까지 다 하게 해 놓으시고
늦둥이 아들만 아직 대학생으로 남겨두고 가셨다.
40 대 중반에 일찍 혼자되시고 재혼도 없이 남자 몸으로 20년이 넘도록 사남매를 키우시느라
병을 키우신 듯 하다는 내 말에 선생님께서도 살아 계실 때 순순히 인정을 하셨었다.
교사의 크게 넉넉지 못한 봉급으로 돌보는 사람없이 사남매를 키우셨으니....
그래서 더 재혼이 어려우셨는지도 모른다.
큰재산없는 사남매 딸린 홀아비.
과로로 인한 혈압에 간암까지 그렇게 병을 키우셨고
은퇴식을 하시고 줄곧 병원 중환자 실에서 사시다가 그렇게 가셨다.
마지막에는 유언의 말씀 한마디도 못 하시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시어 자식들이 더 안타까워했다.
호전되는 기미가 조금 있으시다가 갑자기....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조문객들을 대하느라 파김치가 됐을 유가족들에게 줄 피로회복제며
늦은 밤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 올 친구들 피로회복제까지 넉넉하게 챙겨 나갔다.
은사님의 영정 사진 앞에서 잠시 조문을 하고 가져간 조의금이며 피로회복제를 전하고
친구들한테도 돌아 갈 시간에 맞춰서 피로회복제를 나눠줬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 한두시는 다 넘어갈건데 조심해서 돌아가고
고등학교의 교사 자리에 있는 친구들한테는 제자들에게 엄마처럼 잘 대하냐고 웃으면서 묻고
웃음으로 답하는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은사님의 조문을 마치고 돌아 온 시각이 새벽 두시.
늘 아내의 출입에 시간에 상관없이 기사로 대동해 주는 남편이 고맙다.
돌아가신 은사님께서도 남편을 참 좋아하셨는데....
비록 오늘 있었던 발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고통도 없고 자식들 키울 염려도 없는 그 곳에서 평안하십시오.
먼저가셔서 그립기만 하셨던 사모님 만나시고요.
저희들 선생님의 그 첫정 안 잊고 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사랑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인가 봅니다.
선생님의 제자 된 저희들 많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