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포시 잠들 무렵, 남편이 불러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꿈인듯 생시인듯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간 곳은 욕실.
하얀 김이 안개처럼 몽글거리며 피어 오르고 있다.
커튼을 열어 따뜻한 물이 절반쯤 채워진 욕조 바닥에 앉게 한 그가
무언가 욕조 한 켠에 살그머니 넣곤
손으로 살살 흔들더니
컴퓨터 이동 테이블에 내 노트북을 올려놓고 나갔다.
엄마의 갑작스런 발병에 혼비백산해서
지난 3주 동안
한국과 캐나다의 시간대를 동시에 살아내느라 지친 눈꺼풀이
따끈따끈한 물 속에서 스르르 내려 감겼다.
나른함에 빠져들다가
남편이 욕조 안에 넣고 나간 이상한 물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어느 구석으로 숨어버린 그것을
더듬더듬 찾아 냈다.
뭘까…
상체를 일으켜
뽀얀 김이 서려 조도가 흐릿해 진 불빛아래서 본 것은
삼계탕, 오리탕 끓일 때
얼마전 한국에서 오는 학생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구한 삼베 주머니였다.
이걸 왜…..
욕조에 넣었을까…
의아해 하며 꽁꽁 묶여진 끈을 풀었다.
헛!
내가 아끼고 아끼던
일본산 ‘우전차’ 잎이
파아란 녹색을 띄고 잎을 활짝 펼친 채 가득 들어 있다.
우전차는 녹차 중에서도 여린 첫 잎을 따서 말린 것으로
부르는 게 값(?)일 만큼 좋은 차로 그 가격 또한 비싸기로 유명하고
그만큼
다도(茶道)인들이 탐을 내는 차(茶)인데
-자기 일루 와 밧! 도대체 이게 얼마짜리 차인 줄 알아?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지만
이 황당 시츄에이션을 벌인 그의 의도가
지친 마누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였을 뿐 아니라
우전차 가치를 설명한 바 없었던 내 불찰이란 생각에
활활 타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야 본전이라 생각하는 술꾼처럼
온 몸을 푹 담궜다.
그래… 한 입으로 마시는 것 보다
온 몸의 세포로 마시는 게 수 백배 효과적이라 위로하며
목욕한 다음 삼베보자기는 깨끗이 빨아 삼계탕 끓일 때 쓰면
쥐도 새도 모를 일.
어느새 우전 여린 잎이 우러난 욕조 안의 물은
연녹색 아름다운 빛으로 바뀌어 있고
욕실은 우전 차향으로 그윽해 졌다.
오랜만에 엄마의 환한 목소리를 듣고 난 뒤
감사함으로 쉬는 주말 저녁의 이 평온함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온 대한민국을 질투 반 호기심 반으로 들끓게 만들던
신분불명의 4억 명품녀.
그녀가 타조가죽 핸드백을 컬러 별로 가지고 있든
우리나라에 단 한대뿐인 핑크색 컨버터블 ‘밴틀리’를 타든
관심도 없지만 …
분명 영혼이 가난할 그녀가 소유한 헬로 키티 커스텀 목걸이 값의
1천분의1에 지나지 않는 가격일지라도
사랑하는 이가 삼계탕 삼베주머니에 실수로 담은 우전을 녹여 만든
우전 녹차탕에서 반신욕하는…
내가 바로 명품녀 아닐까.
모두 모두 즐거운 추석 한가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