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 미안해 정말 미안해요 내가 엄마를 버렸어 !
학교에서 돌아온 5학년 딸아이가 제품에 안기며 울면서 하는 말 이였습니다.
무슨 소리야 엄마를 버리다니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를 합니다.
학교에서 일곱 가지 보물을 배에 실고 가는데 풍랑을 만나 살기 위해서 한 가지
씩을 버리는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수업이었다고 합니다.
아이에 보물은 게임기,mp 3, 친구, 부모님, 나, 동생, 2pm(연예인구릅) 이였다고 합니다.
게임기,mp3,2pm 순으로 버리고 그다음은 친구를 버리고 나 자신을 버렸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마지막에 거의 다 부모님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희 딸은 부모를 버리고 마지막으로 동생을 살렸다고 그래서 엄마 아빠께
너무 죄송하다고 하더군요.
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을 차마 바다에 버릴 수가 없었다고요.
저 그 순간 눈물이 나면서 가슴이 벅차올라 딸아이를 꼬옥 않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작은 아이는 발달장애라는 마음에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건 돌이 지나도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정말 이상했습니다.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자기 방에 있다가도 거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뛰어와서 듣는 것 이였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새벽마다 아이가 잠을 자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면 두 시간을 우는 것입니다.
달래도 보고 , 우유도 먹여보고 별짓을 다해도 어디가 아픈 아이처럼 강 그러지게
울다가는 지쳐서 잠이 드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병원에 가서 여쭈어 보니 대수롭지 않게 잠투정 이라 말씀 하시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밤에 전쟁 정말 이지 잠 한번 푸욱 자는 게 소원 이였습니다.
이렇게 밤에만 울던 아이가 두 돌이 될 무렵부터는 무언가 기분이 나빠지면 악을 쓰며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우는 것입니다.
또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 였습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손을 잡아끌고 가서 달라고 하는 것 이였습니다.
동내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항상 혼자 놀면서 장난감 자동차 바퀴 같은 둥근 물건을 돌리면서 그것만 한참을 바라보고 노는 것 이였습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닌 인정하기가 너무나도 두려웠지만 아이는 분명히 다른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25개월 무렵 동내 대학 병원 신경정신과를 가보기로 했습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신경정신과를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 였습니다.
걱정도 잠시 결과는 간단했습니다. 외적으로 아이가 정상이고 하니 36개월 전에는 진단하지 않는다 조금 더 기다려 보라는 것이였습니다.
조금 늣데는 아이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와는 다르다는것을요
그래서 동내 개인 신경정신과로 갔습니다.
36개월 전에 진단이 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으나 분명히 다른 아이와는 좀 다르니 도와달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아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요.
아이에게 유사자패성향이 보인다고 하시더군요.
자패라니요 우리아이가요 왜 하필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니 왜 하필 우리아이게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내가 무얼 잘못했나 !
아님 임신중에 무얼 잘못 먹었나!
내가 남에게 못슬짓이라도 했나 !
너무나 받아 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지 가슴이 갈기 갈기 찟겨저 나가는 느낌이였습니다
울었습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멈추어 지질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제 잘못인것 같았습니다 무얼 잘못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제 잘못으로 아이가 마음에 병이 생긴 것 만 같았습니다
그날 밤 아이아빠는 저에게 소주 한잔을 건내며 이야기 했습니다.
울지마 넌 엄마잖아 울고 싶을땐 나하고 둘이 있을 때만 울어 엄마가 울면 아이들이 더 슬퍼하잖아 다 잘될꺼야 그렇게 제가 여자가 아닌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엄마들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아이에 놀이 치료와 언어치료를 하러 신경정신과로 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후 시어머님께서 아이가 신경정신과에 다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노발 대발 하시며 역정을 내셨습니다.
왜 우리 아가가 정신나간사람들 다니는 병원에 다니느냐 애미네가 정신나간거 아니냐 하고요
시골 분이신데다 옛날 어른들은 아직도 신경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셨으니 당연
한 반응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전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곤 속으로 외쳤습니다
‘저만큼 아프세요! 저만큼 힘드세요! ’
‘어린 아이에 손을 잡고 신경정신과에 가야하는 제 마음은 어떤지 어머님은 아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번에 어머니와에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에 마찰은 문제도 아니였습니다.
아이가 커 갈수록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발달 장애 아이들에 특성이 어떤 물건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데요
한 여름에 두꺼운 스웨터를 입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그 옷을 입고 외출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 외출은 포기 해아 먄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날은 매일 신던 신발이 더러워져 빨고 나서 다른 신발은 주었더니 물이 뚝 뚝 떨어지는 그 신발을 신고 나가겠다고 신발과에 전쟁을 합니다 그럼 또 그날에 외출은 포기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자기도 화가 나서 엉엉 울기를 두 시간
게다가 5살이 되도록 말 한마디도 못하고 응가도 가리지를 못하고 바지에 그냥 싸 버리는 것입니다.
언어에 도움이 될까 하고 아이가 듣던 안 듣던 큰소리로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찾을 때면 저 혼자 이야기 합니다 어 그래 우유 우유 달라고 우유 주세요 하는 거야 우유 우유 하고 똑같은 단어를 수십 수 백번 해 주었습니다. 응가를 가려주기 위해서 변기 앞에서 노래도 불러보고 바지에 응가를 하면 엉덩이를 때리기도 해보고 별별 방법을 다써보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 가족이 마트에 장을 보고 나오는데 작은 아이가 또 우는 것입니다.
또 왜 화가 나서 우는 것일까 ?
또 두 시간은 울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작은아이가
아-이-스-크-림 하는 게 아닙니까
뭐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하니 다시 아이는 아-이-스-크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사주었더니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치는 것입니다. 아이에 말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였습니다
그때 그 감동이란 어찌 말로 표현을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인가봅니다 아이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발전을 하기 시작 하더군요.
그때 아이 아빠가 한말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 아이는 거북이와 같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정상을 향해 갈꺼라고
요......
그렇게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가고 있었습니다.
조금더 많은 자극을 주어 보고자
작은 아이가 7살 무렵 집 앞에 유치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같은 장애우 친구들과에 교육과는 다른 비장애우 친구들과에 통합교육이 필요했으니가요
한달여 즈음 다녔을까요
처음에 잘가던 유치원 앞에만 가면 아이가 안 들어가려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집에 와서도 문득 문득 놀다가 저에게 안겨 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흐느끼면서요
에전과는 다른 좀 다른 느낌에 울음 이였습니다.
알아보았더니 유치원에서 몇몇 아이들이 말을 잘 못하는 저희 아이를 따리 다니며 괴롭폈다고 하더군요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저희아이에게 정말 크나큰 상처를 준 것 같아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고 그 아이들이 정말이지 너무 미웠습니다
우리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선생님들도 너무 미웠습니다.
유치원은 포기 해야만 했습니다.
내년이면 8살 학교를 가야 하는데 학교는 또 어찌 보내야 하나
일반학교를 갈수는 있을까 ! 특수학교를 보내야하나 !
학교에서 아이들이 때리면 어쩌지 왕따를 당하면 어쩌지
정말이지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습니다.
아이를 안쳐놓고 한 대 때리고는 “때리지마 선생님께 이를 거야 ”하라고 연습도
시켜보았습니다.
이 때 이 마음을 그 누가가 알겠습니까!
많은 고민 끝에 그리고 같은 장애우를 키우는 엄마들에 조언을 들으며
일반 초등학교를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집 근처에도 초등학교는 있지만 집에서 약 30분 정도 거리에 통합반이 잘 운영 되고 있는 초등학교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학교를 결정할 당시 아이아빠가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아침에 학교 등교는 자기가 직접 해 주겠다고요.
힘든 짐을 조금씩 나누어 지자고 하면서요.
그렇게 시작된 학교 생활 걱정과는 다르게 학교가는 것을 너무나도 즐거워 하는 것이였습니다.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에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 올라 기쁨에 눈물을 흘렸던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 아이가 벌써 3학년입니다.
아이들 아빠는 3년동안 아이 학교 등교 시켜준다는 약속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랑과 정성이라는 약에 효엄으로 미약하지만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아주 간단하지만 자신에 의사 표현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저를 으음음이 아닌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던 그 말 엄마 엄마 소리를 듣는데 9년이라는 결코 잛지만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부터 시작 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아이가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닌 도움을 줄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저와 우리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한발 한발 더 나아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