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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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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앞 다영이


BY 봉자 2010-03-09

\"슈르륵 슈르륵 \"

한 아이가 롤러 브레이드를 타고 가게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옵니다.

뒤따라 들어오는 담배 손님을 맞으려는 사이, 아이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르긴 해도, 가공식품을 쌓아둔 진열대를 돌아 커다란 음료 냉장고 앞에서

색깔도 맛도 다양한 달콤한 음료를 고를 것이라 짐작을 합니다.

\'고르는 시간이 좀 길지.... 아이들은 다 그래.\' 라는 생각과 함께 

몇몇 손님을 받는 중에 아이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한 십여 분이 흘렀을까요. 

\"아줌마, 아줌마.......\"

음료 냉장고 앞에서 가늘고 맥 없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너, 여태 안 갔구나....왜? 뭐 주까?\"

\" 저기.......\"

아이는 고개를 젖히고 자신의 키 보다  훨씬 높은 곳에

최대한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지요.

아이가 가리키는 것은 새로나온 300ml 용량의 콜라, 요즘들어 인기가 썩 좋은 음료수였습니다.

업체 직원들이 새로 나온 상품을 진열하는 방법은 대개가 전략적입니다.

고객들이 망설임 없이 집어갈 수 있도록,  

어른 키로 기준을 잡아 가장 알맞은 눈높이에 진열한다는 것이죠.

 

입안에서 쏙쏙 튀는 콜라를 제 손으로 잡을 수 없어 봉자를 부른 이 아이는

옆 가게 부동산집 딸 다영이라고 합니다. 

다영이는 올해 초등학교 2학년, 키는 보통 유치원생보다 더 작습니다.

동글동글 오종종 귀엽던 아이 얼굴이

학교를 다니고 부터 수심 많은 어른같이 뚝뚝해 보입니다.

키 때문에 학교에서 아주 주눅이 든 것은 아닐까 싶은 게

요즘들어 학교에만 갔다오면 어디 건 롤러 브레이드만 신고 다닙니다.

롤러 브레이드를 신으면 동그란 바퀴만큼 키가 훌쩍 커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키운 키도 커다란 음료 냉장고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뻗어도 닿지 않으니까요.

 

봉자도 키가 아주 작습니다. 15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단구.

중학교 2학년 첫 월경을 시작한 이래 더 이상 키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키가 작아도 생활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키는 멈췄지만 영혼이 성숙할 수록 좋은 친구를 사귀고, 원하는 직장엘

13 년동안이나 다녔으니 사회생활 하는 데도 하등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각보처럼 알록달록한 꿈을 가진 숙녀에게 키가 작다는 것은 일종의 천형같은 슬픔이었습니다.

마음 속에는 항상, 보통의 키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혀 느끼지 못할

좌절감나 상실감 이런 게 커다랗게 자리를 잡고 있었지요.

이를테면, 목이 메이게 연애를 걸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마음처럼 다가서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용기나 자신감을 가지라고.

그런데.....아시죠?

사랑은, 더구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용기나 자신감 같은 추상적인 감정보다

현실적인 조건이 훨씬 앞선다는 것을요.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상처만 깊게 남는다는 것을요.

 

다영이는 커다란 음료 냉장고 앞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망설였을까요.

아줌마를 부를까.....아줌마가 귀찮아 할거야...

가까이 손에 닿는 것 아무거나 마실까....새로 나온 저 음료수 꼭 마시고 싶은데.....

또래 아이들이 까치발로 닿을 음료수 하나가 다영이한테는 멀기만 하니 

한참동안 속이 상했을 겁니다.

위기철의 \'아홉살 인생\'을 보면 아홉살에도 고민은 존재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이 다 보이니까요. 

 

그래서 안 나오는 목소리로 겨우 아줌마를 불렀을 터인데

봉자가 다가가 다정하게 음료수를 꺼내줘도 그닥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맘이 짠합니다. 

스스로 잡을 수 없다는 좌절감.....

 

이젠 슈르륵 소리가 나고 조그만 아이가 가게 안 쪽으로 방향을 틀면

봉자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갑니다. 

냉장고 앞에서 다영이가 오래 서 있지 않게

원하는 음료수를 최대한 빨리 내려주기 위해서....

 

팔자에 없는 키다리 아줌마가 되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