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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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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BY *콜라* 2010-01-30

\"어릴 때부터 수염을 기르고 싶어서 빨리 어른이 되길 기다렸어. 브래드 피터를 닮았다는 사람들도 있고 대학 때는 수염이 멋있다며 사귄 여자도 있는 걸? 동양여자들은 수염 싫어한다던데 넌 어때? 내가 깎는게 좋을까. 기르는 게 좋을까?\"

일주일에 두 세번 오는 단골 손님.

구렛나루에서부터 기른 수염이 잘 어울리는  이 남자. 

하필 바쁜 점심시간에 와서 카운터 앞에서 수염자랑이 늘어졌다.

 

올해 만 5년 캐나다 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직 짧은 영어로 손님 커버하기도 머리가 핑핑 돌고

할 일이 많아서 눈마저 핑핑 돌 지경인데 

지 수염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해도 내 알바 아니다.

 

출입문까지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보며  

\'그래 그래 멋있다... 넌 수염이 길어도 멋있고 짧아도 이쁘고.....\'

건성건성 속사포 같은 대답을 날렸다.

 

지난해 부터 페스트푸드 레스토랑을 하고 있는 내겐

점심 시간에 누가 죽인다는 예고 전화를 해도 도망 갈 시간이 없어서 죽어야 할 판.

제발 좀 가주면.... 그게 부조이건만

평소 좀 살갑게 대하긴 했으나

이건 아니잖아~

 

하지만 서비스란 자고로 표정관리가 포인트.

미소 머금은 고운 낯 빛으로, 그러나 낮은 톤으로 날리는 한국어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하이고~ 이 남자  진짜 말 많다. 야, 빨리 만들어. 얼른~ 보내..\"

 

주인 아줌마 급한 성질 아는 직원이 화살같은 스피드로 주문메뉴를 마무리...

덩달아 내 대답도 빨라 졌다.

응.. 응...응... 그렇구나.....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남자, 문을 나서며 할 말이 더 있다며  \'컴 백\' 한다는 말을 했지만

지가 \'백\'을 하든, \'턴\'을 하든 자유. 

백인 남자들이 단골 레스토랑 아줌마에게 할 말이란 게 뻔하다.   

지가 키우는 개 자랑 아니면 아이스하키 선수 이야기....

 

휴.

보냈다. 

그리고 영혼을 판 사람처럼 정신없는 점심 시간이 끝나고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이!! ............\"

유리 문 너머로 

얼핏 그 남자..... ? 비슷한 남자가 보인다.

 

허....

특정인에게 시달렸더니 헛 것이 다 보인다 싶어

눈을 깜빡 한 다음 다시 봤다.

그 남자다.

 

\"너.. 너.......왜 또 왔어?\"

단골 손님에게 할 인사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WAY?\'가 먼저 튀어나왔다.

 

뭔 일인지 얼굴까지 빨개지며 수줍은 웃음을 짓던 그 남자가 하는 말.

\"나 수염 깎았어....\" 

\"어! 그래..? 왜? 아까처럼 긴 것도 괜찮았는데....\"

 

무심코 던진 내 대답에 화들짝 놀라는 남자, 정말 수염 길렀을 때가 더 좋았냐고 되 묻는다.

사실, 길든 짧든 뭔 상관이냐는 말이 하고 싶었지만 둘 다 좋다고 대답해 줬다.

그런데 대략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너가 좋다고 하면 깎으려고 아까 물었을 때, 너가 멋있을 거 같다고 해서 바로 깎고 왔는데....\"

환장하겄네

참말로... 

 

\"내가 언제!!! 언제 너 수염 깎으라고 했어!!! 바빠 죽겠는데 너가 수염 기르는 걸 좋아한다기에 

귀찮아서 멋있다고 했지! 글구 너가 수염을 깎든 기르든 내가 뭔 상관이야~~~~~ 헐!\"

이것이 정답!!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어로 이런 감정표현 처리 불능.  

 

서양 남자들도 우리 조상들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하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니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 하듯, 심경의 크나 큰 변화가 생겼을 때와 어떤 각오를 다져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증표로 수염을 깎을 만큼 숭배의 대상이다.  

 

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십 수년 애지중지 하던 남자의 수염, 그걸 자르게 했다는 건 커뮤니케이션 부재이며 서비스 문화 충돌의 산물.

이 일을 어찌 수습할까 궁리하며 주방을 힐끗 쳐다보는데

주방 안에서 일하던 아가씨 직원 한 명이 무슨 일 인가 해서 얼굴을 내민다.

 

\"경미야 일루 나와 봐~ 너 몇 살이야? 아니, 수염 너! 넌 몇 살이야?\"

\"서른 한 살\"

\"경미 넌~\"

\"서른 살이요.\"

하이고 잘 됐네. 야~ 수염아! 너 얘하고 친구하면 되겠다. 나는 너보다 훨 나이가 많아~ 경미 넌! 캐네디언 친구랑 이야기 할 기회 많이 만들어야 공부가 되니까 앞으로 이 남자 올 때마다 대화 많이 나누는 친구 해라 잉~\"

 

급한 마음에  외국인들에게 절대 금기인 나이 물어보는 것도 모자라

한국 스타일로 나이 숫자 맞춰 친구 맺어 준 뒤 

빼앗 듯 그 남자의 명함 한 장을 경미에게 안기고

나는 빠졌다.

 

그런데 쬐금, 쬐금 아쉽다.

내가 싱글 이었음..... 내 껀데.....

에구~ 유부녀도 뭐 영어 친구 하나쯤 필요한데 나도 친구 먹자고 할까? .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

뭐 이런 심정은 아니고......

 

그 순간

수시로 내 무식함에 염장지르며, 무시로 내 자존심에 불지르며

다짐 하던 남편의 말이 주마등 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넌, 외국인 남자가 뭘 물으면 무조건 영어 못한다고 해\"

죽인다고 하는 지, 죽일 거라 하는 지,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는 지 

대충 알아 듣고 \'예스\'했다가 합법적인 죽음 당할 지 모른다고.

 

흐~

만약..........

수염 아니고 그 아래 \'목\'이었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