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가 짧은 사촌 동생....
20년 전 작은 아버지 , 작은 어머니 모두 돌아가신 후 부모가 된 엄마 아버지는, 그애 장가보내고 돌아가시는 게 남은 여생의 마지막 임무인 듯 애를 쓰셨다.
다행히 대학 졸업하던 해 대기업에 취직해서 정상인들과 동일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결과 30대에 임원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 앞에선 사회적인 바탕도 육체적인 장애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장애를 가진 남자를 좋아 할만큼 희생적인 요즘 아가씨도 드물지만, 장애인 사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들의 편견이 더 큰 장애물이었다.
마흔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혼자 사는 동생을 바라보는 엄마 아버지의 걱정은 태산이었다. 덕분에 데이트 비용이니 허튼 돈 나갈 곳이 없었던 동생의 통장 잔고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두둑해 졌지만, 모두들 그 성실함과 근면함에는 감탄 하면서도 정작 결혼 앞에 서면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아가씨만 있다면 서울에서 경상도까지 달려가 맞선 자릴 마련하며 고군분투 했지만, 번번이 십중구구 퇴짜를 맞았고, 어쩌다가 희망이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깨어져 엄마와 동생의 상처는 늘어만 갔다.
그런데 우리가 캐나다로 유학 온 사이 맞선에 성공해 드디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잠시 한국을 갔던 지난 가을 마침 결혼식을 마친 동생내외가 하와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정 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 연락이 왔다.
엄마는 결혼식날 부모대신 폐백을 받으며 신부의 치마 폭에 알밤과 대추를 던져주고 남은 폐백 음식을 집으로 가지고 와 냉장고에 넣어 두셨던가 보다. 어릴 때부터 날 밤을 좋아하는 나는 무심코 엄마 앞에서 큰 알밤 하나를 골라 깨물려던 찰나 빼앗겼다.
\"하! 깜짝이야. 엄마 왜 그래?\"
\"아.... 몰라......기냥 ...... 안돼... \"
말까지 더듬는 엄마는 좀 미안했던지 내 눈치를 보시면서도, 끝내 큰 알밤을 모두 골라서 새색시 줘야 한다며 감추고, 대추는 씨를 빼내고 요리에 써야 한다며 두껑을 꼭꼭 눌러 닫아 버렸다. 무안하고 서운해 정말 우리 엄마 맞는 지 물어보고 싶었다. 몇 년만에 공부하다가 돌아 온 막내 딸이 그 알밤 하나 먹는 걸 빼앗을 만큼, 그렇게 사촌동생의 색시는 엄마에게 딸보다 귀한 존재였던 것.
내가 결혼하고 신혼여행서 돌아와 친정에 오던 날도 트레이닝 복에 늘 입던 고무바지 그대로 계시던 엄마 아버지는, 아침부터 고운 한복 차려 입으시고 고기에 잡채, 찜닭, 오색전을 부치며 음식장만하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온 집안에 고소한 냄새와 맛있는 음식향이 넘쳐나 진짜 잔치집 분위기였지만, 일 복 많은 사람 어딜 가나 일 복만 터진다고 휴가차 한국을 갔던 우리는 아버지의 허름한 셔츠 입고 집 안밖 대청소하느라 1일 청소부로 동원된 부부 용역이 따로 없었다.
\"아이구~~~ 색시가 얼마나 이쁜지 .... 그 엄마도 참하고, 그 오빠도 멋지고 아버지도 점잖으신 분이...\"
엄마 눈에 그 집 똥개인들 예쁘지 않을까만, 내심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다.
드디어 도착한 새색시.
하아...
정말 예뻤다.
객관적인 기준을 잣대 삼아도 바라본다 해도 \'참한 아가씨\'라는데 이견을 붙일 수가 없었다. 늘씬한 키에 뽀얀 얼굴,잔잔한 이목구비와 부드러운 눈빛이 \'참하다\'고 했던 엄마 말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게다가 윗사람을 대하는 포장되지 않은 예의가 몸에 배어있어 단번에 마음을 쏙 빨려들게 했다. 당황한 건 나였다.
\'장애가 있음 어때. 그것말고 빠지는 게 뭐 있어.....\'
동생 앞에서 그렇게 말하며 용기를 주곤 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착하면 뭘 해... 돈 많으면 뭘 해... 장애있는 남자를 받아들인 건 다 이유가 있을거야.\" 한마디로 \'별 볼일 있겠어? \' 하는 편견과 오만함이 내 안에 있었음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책 한 권을 꺼내 오셨다.
\"야야!~ 너그들은 아들 낳으면 이름을 \'성\'자 돌림으로 해야 한다. \'성광\'이 어떠냐 이룰 \'성\'에 빛 \'광\'~~\"
신혼여행 다녀 온 신혼부부 앉혀 놓고 아이 이름을 짓는 사람은 세상에 우리 아버지 말고 또 있을까. 형보다 먼저 세상 떠난 아우의 아들, 조카 부부를 자식이라 생각하시던 아버지의 그간 염려와 바램이 얼마나 컸던가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혹여 연로한 당신이 첫 아이 만나보지 못하실까 염려스러운 게다.
고생만 하다가 세상 떠난 동서 생각에 결혼식 내내 우셨다던 엄마, 또 색시의 손을 만지며 연신 눈물을 훔친다.
\"아니 엄마~~~~ 남의 결혼식가서 큰 엄마가 울어대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부모없다고 다 고아야? 낼모레 쉰 줄을 향하는 마흔 살이야.\"
어떤 말로도 엄마의 안타까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제서야 그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정말 동생의 색시보다 예쁜 여자는 세상에 없어 보였다.
몇 년만에 친정 집에 온 막내 딸은 밥도 굶은 채 산더미 같은 설겆이에 어깨 뼈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새색시 먹이는 일에만 온 정성을 다하던 엄마는, 부부가 일어서자 감춰 둔 온갖 말린 나물들을 챙겨 손에 쥐어 보냈다.
동생 부부를 보내고 엄마는 방바닥에 두 다리 쭉 뻗고 누우시더니 천정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신다.
\"아고 아고~ 이제 됐다... 동서야 이제 안심해도 된대이~ 나도 이제 발뻗고 잘께 동서도 편히 쉬어라.....\"
하나님은 정말 짖궂다.
이렇게 짝을 지어 주실거면 진작 좀 알려주시지, 왜 그렇게 우리 엄마 애간장을 끓게 놔 둔 걸까. 아마도 아름다운 인연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더 뜨겁게 사랑하게 만드시려는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