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635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연재13-갈등 conflict


BY 사랑의 빛 2009-12-21

갈등 conflict

 

   

사람이면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에 직면하고 싶지 않은, 정말로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나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외면해 버리면 될까요?

우리 인생에는 외면해도 될 일이 있고, 외면해선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나 실제 현실 속에서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것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 그 상황과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입니다.

 

내가 그녀와 한창 열애에 빠져 있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무척 좋아하고 아껴주었는데, 어떤 일을 계기로 남자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은 매우 가난했으나 남자의 집은 매우 부유했습니다. 서로 친하게 되자 그녀는 남자의 집에도 출입하게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남자 집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가정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자신의 가정 형편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자존심 강한 그녀는 남자의 끈질긴 매달림에도 불구하고 그를 뿌리치고 떠나 버렸던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나는 ‘음, 그런 일이 있었군. 나도 헤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뭘.’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가볍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가한 시간이 되면 문득 문득 그녀의 첫사랑 장면이 내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자동적으로 그들의 사랑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 선까지 진행됐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남녀 간의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듯 그들도 깊은 관계까지 갔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진실은 나 자신도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 나에게는 그 일이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수시로 떠오르는 그들의 사랑 장면은 내 마음속에 적잖이 고통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애써 떨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뿐, 또 한가한 시간이면 어느 샌가 나의 마음속을 파고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끈질긴 투견 같았습니다. 틈만 나면 나를 공격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를 끈질기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들의 사랑 장면을 마음속에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생각이 흐르는 대로 놔두었습니다.

그 생각은 늘 같은 방식으로 흘렀습니다. 나는 그냥 그 장면을 지켜보는 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처럼 내가 거부하고 싶은 장면에 개입하여 흐름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남자와 관계를 맺는 장면까지 다 상상해 버렸습니다. 그 과정은 나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그 생각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만약 여러분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 떨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외면하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럽더라도 그 생각을 이해하고 그 생각과 직면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생각을 뿌리째 뽑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내 마음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나 자신 속의 ‘나(에고)’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공허한 ‘나’는 그녀를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욕망이 그녀의 첫사랑 얘기, 아니 망상적인 상상에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나’지, 결코 우리의 본질인 생명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마음의 고통’(나)이 있고, 또 한편으로 그 고통을 지켜보는 ‘깨어 있는 의식’(생명)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의식은 맑게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지켜보는 자, 그 아픔을 관조하는 의식,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변함없는 본질인 생명인 것입니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해 보면, ‘나(에고)’는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이고, 우리의 본질인 ‘생명’은 관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무대 위에서 아무리 무서운 장면이 공연되고 있다 하더라도 관객은 단지 관찰자로서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 중에는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현실로 착각하여 자신이 마치 그 사건의 등장인물인 듯 두려움을 느끼거나 심지어는 비명까지 지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 관객은 무대와는 떨어져 있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질인 생명도 우리의 ‘마음의 고통’을 관객처럼 무심하게 관조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그 고통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고통은 느껴지지만 그 고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나(에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면 마음의 어떤 고통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고통을 녹여 버립니다. 우리의 본질인 ‘생명’은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 그것이 관찰자가 되어 ‘나’가 일으키는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지켜보고 있으면 그 고통은 마치 레이저에 의해 암이 녹아 없어지듯 그렇게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힘이요 사랑의 위대한 연금술인 것입니다.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