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연탄난로 들여 놓을 때 남편과 한바탕 싸웠다.
한바탕 싸웠다고 하지만 연탄난로 설치 건에 대해
봉자를 위한, 봉자에 의한, 봉자의 일방적인 악다구니에 가까웠다.
\"애써 새 건물 빌려 시작한 가게 들머리에 구질구질 연탄난로라니,
백원짜리 장사랑 딱 어울리는 쥐구멍 백화점이다.\" 라며
큰소리로 떠들어도
\"싸잖아.\"
이 한마디 뿐, 남편은 묵묵히
그러나 매우 어설프게 연탄난로만 설치하고 있었다.
사실 요즘 같은 불경기라면
\"싸잖아\" 이 한 마디로 봉자는 나가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처음 연통이나 연탄집게가 널부러진
꼬질꼬질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구멍가게의 진수를 보이는구나....\' 끝모를 서러움 같은 게 차올랐다.
그래서 봉자는 연탄난로 설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미덥지 못한 남편에게 지금 내가 얼마나 불행한가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었던 것 같다.
내 머리는 벌써 퇴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두 자리 숫자만 넘어가도 더하기 빼기 혼란스러운데
연탄가스 마시게 해 기어코 정신줄 놓은 뒷방 할미 만들고 싶냐고,
코딱지만한 가게 지키지만
정말이지 봉자만의 우아는 지키고 싶다고......
그렇게.....아무리 핏대 올려도 요지부동인
남편 앞에서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나 이래봬도 고상한 여자야.\"
친히 탄불 갈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남편 앞에서
\"구멍가게 연탄불선언\"을 일방적으로 통고해버렸다.
그랬던 봉자가,
지금은 연탄난로 죽순이(죽치고 앉은 여자)가 되었다. 새삼 연탄불이 예뻐 죽겠다.
연탄불 예뻐 죽을 일 대략 꼽아도 다섯 손가락을 넘기는데
그 첫째가 전국민의 냄비밥이다.
연탄불에 냄비밥 고슬하게 지어 놓으면
김치 한 종지만 갖다놔도 새끼, 서방 할 거 없이 바닥이 보여야 숟가락을 놓는다.
\"아들, 학원 갈 시간이다. 숟가락 좀 놓지?\"
\"보소, 당신 젤 먼저 숟가락 들었거든?\"
밥상 챙기느라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한 봉자는
도무지 멈추 줄 모르는 거대한 먹보들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쏘아부쳐야 한다.
그래야만 간신히 누룽지라도 삶아 먹을 수 있다.
봉자는 2% 부족한 배를 채우려 고구마를 호일에 싼다.
두 번째 연탄이 예뻐 죽을 일이다.
연탄불에 구운 고구마 맛은
뜨거움을 참아가며 한 입 베어 물 때 절정이다.
노랗게 익은 속살 때문에 입천장이 더러 익기도 하지만
엿을 고은듯 달짝한 맛이란
난로 위의 상시 대기조, 따끈 구수한 보리차와 함께 이 겨울을 녹인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아우르고 남을 초절정 베스트는
늦은 밤 연탄불에 구워먹는 삼겹살이다.
밤 12시가 다가오면 남편은 주섬주섬 문 닫을 준비를 하고
봉자는 은근하게 남은 연탄불 화기에 석쇠를 걸쳐놓고 삼겹살을 굽는다.
자글자글 기름기 적당히 뽑아낸 고기가 익어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주 한 병 꺼내 들고 흔들어 보인다.
\"됐고?\"
\"됐지!\"
서로의 눈망울에 7부로 채운 소주잔이 투영되는 그 순간이
고기 한 점 쌈장에 찍어 입안에 넣을 때라
까슬까슬하게 씹히는 고소한 삼겹살과 함께
한 잔 두 잔 병 속의 소주도 점점 비어져 나간다.
이윽고 연탄불 기운이 따스하게 돌고, 발그레한 취기까지 오르면
이런 날은 꼭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삼겹살 진공 청소기인 배불뚝이 남편이 홀연히 사라지고
평소 봉자가 흠모하던 (미국 드라마 CSI 에 나오는) 샤프한 호레시오 반장이 마주 앉아있다.
여차하면 이대로 호레시오 반장과 뜨거운 밤을 보낼 것 같은 예감이요,
\"싸잖아\" 했던 말이 \"싸랑해\"로 가치가 무한 상승해버리는
이른바 연탄난로 기적 같은 행복한 겨울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탄불이 주는 충족감 때문에
있지도 않은 스타일 구겨질까 머뭇거리던 연탄갈이도
이젠 봉자가 알아서 척척 해낸다.
그동안 원터치 생활만 쫓느라 허리통 오지게 굵어졌는데
하루에 두어 번 연탄들고 허리 굽히는 노동으로 등 따시고 배부르다면 과장일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다른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고,
어느 시인이 던져놓은 뼈아픈 물음 때문인가
오늘처럼 추운 날,
꽃대 같은 불기운이 우르르 올라와 파란 꽃불 너울지면,
연탄은
남편이 가져다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숭어리로 보인다.
주위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연탄집게 들고 궁상 떤다고 하지만
기름이야, 가스야 깨끗하고 편안한 줄 왜 모를까.
덜 떨어진 애국심 갖다 붙이지 않아도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이땅에 달러 굳히고
봉자네 살림도 굳는, 이짓을 난 좀 오래 계속해야겠다.
봉자?...... 이래봬도 탄불 가는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