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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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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나 급한데....


BY 봉자 2009-11-25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아주머니 얼굴이 누렇게 떴다.

 

이 동네 뒷골목, 유일하게 남은 자투리 땅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한 두 번씩 들리는 손님이다.

오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의 인상은 평소에는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데

비굴하게 웃는 거며, 눈빛까지 살짝 흔들리는 게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눈치였다.

 

\"아줌마, 나... 급한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영 불안한 생각도 없지 않지만,

봉자가 먹고 죽을래도 없는 돈 빌려달라는 소리만 아니라면야...

 

\" 아, 뭐~가 그리 급한뎁쇼?\"

속마음을 숨기려 장난끼 섞어  말대답을 하고나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진다.

 

\"왜요,  왜 그러시는데요?\"

움찔 놀라 정색을 하고 재차 물으니

 

 \"화,,,장실 좀.....쓰면 안 될까?\"

 

어휴, 이 아주머니,

\" 아이고, 안 되긴요, 얼른 이쪽으로 쭉.....\"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눈치껏 위치를 파악한 아주머니는 뒤뚱뒤뚱

펭귄 걸음을 하고는  잽싸게 화장실로 가버린다.

 

봉자네 화장실은 가게 안에 있지만

세제를 진열한 매대로 살짝 가려놓아 웬만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렇게 살포시 위장술을 쓴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화장실 입구에 작은 간이 싱크대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니

급한대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곳이다.

 

간이 싱크대 위에는 낡고 작은 전기밥솥 하나와

두부 담는 프라스틱 네모판이 얹어져 있는데, 

녹두색 두부판 안에는 두부 대신 밥 그릇 몇 개가 엎어져 있다.

 

별스럽게 위생을 따지는 사람이 보면,

엉성하니 비위생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간이다.

더구나 바로 옆이 화장실이 아닌가.

 

이런 곳을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것도 민망하고

화장실까지 사용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건만

요 며칠 사이,

화장실이 급해 들어온 사람은 저 아주머니 뿐만이 아니다.

 

남자들도 몇 명 있었는데, 봉자도 인간인지라 먼지 뒤집어 쓴 인부들이

화장실을 쓰자 할 땐 저절로 꺼려지고 망설여진다.

 

내 가족이 사용한 뒤처리도 못마땅할 때가 많은 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배설물과  깔끔하지 않은

뒤처리까지 용납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만만하게 보였던 구멍가게 장사,

이런 복병이 튀어나올 때마다 안절부절 하지만

이만저만 수긍하며 지탱해왔던 구멍가게 4년차,

슈퍼 아지매 봉자는 의외로 쉽게 결정을 내린다.

 

배설이 급한자들에게 공중 화장실이요,

이 동네 길 모르는 낯선이에겐 살아있는 네비게이션이요,

학원차 기다리는 맞벌이집 아이에겐 시간 알림이 역할까지 

언제나 구멍가게의 소소한 서비스 정신을 잊어선 아니 될 말이다.

 

불특정 다수인이 왕왕 사용해대는 식당이나 카페 화장실에 비하면

아주 가끔 외부인이 사용하는 것을,

또 그럴 때마다 소독제 흠신 묻혀 닦아주면 될 것을,

애시당초 무얼 그리 끙끙대며 고민했을까 싶다.

  

 아뭏든 그 아주머니가 볼일을 보는 동안 봉자는 생각했다.

 

\'달랑 세 음절뿐이 안 되는 <화. 장. 실> 이 말이 그렇게 발음하기 어려웠나?\'

 

막일하던 사람이 남의 화장실 빌려 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비약과 개연성을 섞어 혼자 웃다말다 하는 동안

아주머닌 허리춤을 추스리면서 이쪽으로 걸어나왔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

잘 썼다며, 면구스러워 하는 중에도 잊지않고 한마디 하고 나간다.

\"나중에 우유랑 빵이랑 참거리 몽땅 사러올게요~ \"

 

\".......^^;;\"

 

아주머니는 뒷골목 공사중인 건물에서 일을 한다.

건물이 웬만큼 모양을 갖추고나면 마무리 공사에 바닥을 매끄럽게 하는

일명 도끼다시, 우리말로 갈아닦기를 하는 일용 잡부인 셈이다.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작은 공사판에는 따로 간이 화장실을 설치해주는 데가 거의 없다고 하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면 용변 보는 일로 곤욕을 치룰 때가 많은 데

공사 하는 곳이 한적한 외곽이 아니고 상가, 주택가로 둘러쌓인 곳이라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허리춤을 잡고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만 한다고....

 

식당을 이용하면 한결 쉽게 풀릴 문제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려 도시락을 싸오는지라

몇 군데 부탁하는 곳마다 이런 저런 핑계로 거절을 하더란다.

 

참다참다 생각난 곳이 봉자네 가게인데, 화장실이 안 보여 밖에서

이리저리 살피다 워낙 상황이 급박한지라 죽기살기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동안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한 번도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생각 없이 살아왔는데,

우리가 살면서 한 두번 경험하고 말 고충을 그들은

번번이 겪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싸아 해진다.

 

찬바람 시린 한 데서 몸을 부려 밥 벌어 먹는 것도  고생스런 일인 데

일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용변 하나 처리할 곳 없어 허둥대야 하다니....

 

산뜻하게 다 갖춰진 실내에서

돈 버는 직장인들은 상상이나 할까.

 

해서, 비 맞은 땡중처럼 홀로 중얼거린다.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것은 서러움이요,

갖고 싶어도 못 가지는 것은 안타까움이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고것은 뱃살 때문인디,

싸고 싶을 때 못 싸는 건 참을 수 없는 고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