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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거 별거 아녀~! (제29회) 다시 사는 삶


BY 만석 2009-08-31

 

1부 제29회


다시 사는 삶


  퇴원 20일 뒤에 위의 음식물 통과 검사를 20분 간격으로 하루에 수차례 하고 드디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먹지 못했던 한을 푸는 것일까. 나는 포만감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계속 입을 채웠다.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갈망정 오늘은 한을 풀어야 한다는 식으로……. 아무튼 식구들은 내 입을 호사시키기에 무척 바빴다. 먹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었음을 왜 진즉에는 몰랐을꼬. 이젠 배설 문제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식도절제술을 받은 환자의 식사지침>서는 안방 화장대 옆에 붙여놓고 늘 들여다보긴 했다.


  먹고 눕고 또 먹고 또 눕고……. 햇볕도 싫고 사람도 싫고……. TV도 귀찮고 라디오도 는 더 귀찮고……. 싫고 또 싫고 귀찮고 또 귀찮고……. 그러나 사실은 이게 내 스타일은 아니다. 언젠가 폐경이 오면서도 그렇게 우울증이 왔었다. 우울증? 아니, 그럼 또 우울증? 내가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겨? 안 되지. 절대로 용서가 안 되는 일이지. 이건 어디까지나 자가진단이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내 마음도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지. 우울증이 아니어도 이러다 죽음을 맞을 수는 없는 겨. 내가 누군데. 대로행(大路行)만 한다는, 곧 죽어도 그 이름도 거룩한 군자(君子)가 아닌가. 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그리 지어주셨다는 내 부모님은, 내가 시들은 시금치처럼 목이 꼬일 때마다 일으켜 세웠다. 그렇지. 지금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결정적으로 나를 불러 일으켜 세운 건 아이들의 결혼이었다. 1월에 큰아들이 신부를 맞았다. 병 중에 있는 나로 인해서, 대체로 생략되는 절차가 더 많았다. 곧 이어 막내아들이 5월에  결혼날짜를 잡은 터라, 음력으로나마 한 해에 두 번의 혼사를 피하자고 음력 12월(양력 1월)에 큰아들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서두르지 않았어도 족했던 것을……. 나와 큰아들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작용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나대로 ‘내가 여차하기 전에’라는 꿍꿍이였고, 아들은 아들대로 ‘엄마에게 보호자가 필요해’하는 계산이 있었다고 한다. 실지로 결혼 후 제 댁이 엄마 곁에 있어야 한다며, 분가도 마다했다.


  막내아들의 청첩장을 돌리면서 급기야 내 병이, 서둘러 결혼식을 할 만큼 아주 심각하다는 소문은 더해 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막내아들의 결혼식 즈음해서는 오히려 내 몸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큰아들의 결혼식에 썼던 가발을 막내아들의 결혼식에서는 벗어던진 뒤였다. 다만 타국에 혼자 있는 녀석인데 이왕에 마음이 맞는 그녀가 있으니, 어서 곁에서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라는 우리 부부의 심오한 뜻이 있었다. 결혼식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심한 몸살을 했다. 막내아들을 결혼시키고 직장이 있는 일본으로 그들을  출국시키고는 탈진을 했다. 몸보다도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막내딸아이를 건너뛰고 동생을 먼저 결혼시킨 어미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큰 시름에 빠졌다. 저것도 마저 치워야 하는데…….


  막내 딸아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어느 날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예고도 없이 막내딸아이가 파일을 잔뜩 들고 들어섰다. <식도암 투병기>, <식도암 수술 경과 일지>, <암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 사이트> 등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모양이다. 엄마도 암을 앓는 사람들의 모임 카페에 들어가서 정보를 공유하라고도 권했다.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딸아이는 참으로 영악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동안의 내 투병일기가 딸아이의 메모를 바탕으로 했음을 고백한다. 어미가 응급실로 실려 가면서부터, 어떤 경로로 검사를 했는가와 검사결과까지를, 아이는 모두 메모도 하고 병원에 청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환자별 통합 검사 결과>지를 요구해서 어미가 정상인과 다른 수치를 나타내는 것을 알아보기도 했었던가 보다. 또 국민보험공단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서, ‘중증환자’가 누리는 혜택도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식도암을 앓는 환자들에게 유익할 서적도 여럿 리스트로 만들어 왔다. 이제 아이는 내 스승이다. 고마운 녀석이다. 오~냐.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우선은 몸을 좀 움직여 보아야 할 것 같다. 아, 바둑알을 옮기는 운동이 있었지. 그래. 그것부터 시작하자. 큰아들이 남편의 바둑알 중 40개를 골라다 놓았다. 안방에서 거실을 거쳐 건너 방으로 한 알 한 알을 옮겼다. 걸음으로 세어보니 34걸음. 왕복이면 68걸음이고 40번을 반복하니 2720걸음이다. 세 끼니마다 다시 반복되니 8160걸음. 의사들이 보통 하루에 만 보를 권장하니 그럭저럭하면 만보가 훨씬 넘겠다. 요새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TV에서도 운동 프로그램을 많이 보여준다. 걷기운동은 그만하면 족하고, 온몸운동은 TV 프로그램을 따라 하면 된다. 몸을 움직이니 머리도 맑아진다.


  무료한 시간엔 인터넷을 뒤졌다. 내게 유익한 정보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식도암에 좋은 음식과 가려야 할 음식. 환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행동 등 등 등……. TV도 자연스럽게 건강에 대한 프로만 찾게 되었다. 의술의 대단한 힘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사가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이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처음엔 1개월 간격으로 정기검진을 다니던 일은 2개월에 한 번에서 다시 3개월에 한 번으로 멀어지자, 내 몸이 차츰 좋아지고 있음도 내 스스로 알 수가 있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이만하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해도 좋을 듯하다. 강의를 다시? 퇴원 뒤에 만사가 귀찮아서 접었던 글쓰기를 다시?

쉰 목소리로 강의는 아직 어렵겠다. 글쓰기도 강의 후기를 쓰던 것이어서 어렵겠다.


  수술을 하면서 건드린 성대는 시간을 두고 보자 하더니 조금도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옥구슬을 굴리는 소리는 아니었어도 나이에 맞지 않게 가늘고 낭낭한 목소리를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의 앞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시장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 주인은 알아차리고는,

  “한 근 드려요?”한다.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면 챙겨주었다. 다음에 그 가게엘 가면 아주머니는 벙어리 시늉을 하면서, 수화처럼 손으로 가리키고 끙끙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줄로 안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었으나 기분이 언짢았다. 쉰 목소리라도 들려주자. 벙어리보다는 나을 것 아녀?!

  “삼 천원어치 주세요.”

  주인은 깜짝 놀라서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럴 땐 웃어줘야 재미가 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