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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거 별거 아녀~! (제11회) 피접을 가다


BY 만석 2009-07-28

 

1부 제11회


피접(避接)을 가다

  

  시어머님 생각이 난다. 어느 때에는 따님 네 가신 어머님이 좀 여러 날 머물러 오셨으면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잘해야 하루 밤 주무시는 게 고작이셨다. 따님 네는 그리도 어렵더라고. 내가 지금 그 지경이다. 한 달이나 병원 신세를 졌으니 짐 보따리가 올망졸망이고, 한 달 분량 내 먹이가 적지 않다. 머릴랑은 어울리지도 않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입원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퇴원을 하자 하니 철이 지나도 많이 지난 옷에다가……. 병원에서 챙겨 준 약봉지는 또 얼마인고. 남편에게 옷을 좀 갖다 달랬더니, 차를 타고 갈 터인데 무슨 옷이 필요하냐고. 이 꼴로 딸네 집에 들어가자니 이웃이 알아볼까 걱정이다. 우선은 사위 보기에도 그렇고…….


  거실의 커튼을 젖히며 딸아이가 말한다.

  “오시길 잘했죠? 시원하죠?”

  글쎄다. 잘 오긴 한 건지…….그저 웃어 보이고 달려들어 반색을 하는 손녀딸 아이들에게  손을 잡힌 채 빈 방으로 들어간다. 외손녀 딸아이들은 병원에 다녀간 뒤로도 많이 큰 듯, 나보다 한참 크다. 마침 여분의 방이 있기를 얼마나 다행인가. 곧 이사를 갈 량이라서 아이들 침대를 바꾸려던 참에, 침대를 미리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주인 없는 방에 놓인 침대가 어제 들여놓은 새 침대라는 말이겠다. 내가 쓴 뒤에는 손녀 딸아이가 쓸 침대란 말이지. 완강한 내 저지에 딸과 손녀들이 새 침대와 헌 침대를  바꾸느라 분주하다. 그래도 그게 맘이 편타. 아픈 할미가 누웠던 침대에 저 예쁜 것들을 누이다니……. 말도 안 되지.


  이제부터 이사를 할 때까지는 여기가 내 방이란다. 장롱이야 붙박이니까 그렇다 치고, 여러 가지를 배려한 표가 난다. 서랍도 여럿 비워놓고 이불도 준비하고……. 나름 바빴겠다.

  “Welcome to my home!\"

  “Thank you!\"

  주차장에 차를 넣고 들어오는, 유난히도 목청이 우렁찬 내 사위의 환영사다. 나도 그쯤은 알아듣고 답례 정도는 한다는 말씀이야. 눈치 빠른 독자는 감을 잡았겠다. 내 사위는 미국사람이다. 그러니까 내 큰딸은 국제결혼을 했다.


  나의 두 딸아이는 유난히도 자아의식(自我意識)이 강하다. 그네들은 가끔 제 오빠와 남동생 앞에서, 한국의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에 반기를 들어 열변을 토하곤 한다. 넓게는 지독히도 강한 한국 남성들의 남존여비사상을 타도한다. 그러던 큰딸이 대학에 입학을 하고 영어를 배우면서, 서양의 남성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한국의 남성과 그들을 비교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서양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매너에 매료 되어, 국제결혼까지를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선견지명(先見之明)이요, 나쁘게 말하면 그 당시로는 용서받지 못할 집안의 이단아(異端兒)가 될 대 사건(大 事件)을 저지르는 셈이지. 남편은 그게 모두 제 에미를 닮은 탓이라고 혀를 찼다. 나도 살짝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의 선견지명은 너무나도 올곧았다. 지금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요사이 그 말 많은 원정출산(遠征出産)을 걱정하지 않아도 족하고, 조기 영어 교육을 걱정하지 않아도 두 손녀딸은 영어가 유창하다. 몇 년의 미국생활이 그렇게 만들었고 방학 때마다 미국으로 휴가를 떠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딸아이는 이제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적잖은 찬사를 받는다. 심지어는  내 딸아이 사는 모습을 보고, 중매를 부탁하는 친척도 많다. 물론 국제결혼에 실패하는 예를 들어, 우리 부부가 쉽게 결혼을 승낙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본국으로 떠나는 사위 감을 따라 간다고 딸아이가 우기는 데에는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울며 겨자 먹기로 2년 뒤의 귀국을 조건으로, 그리고 시부모를 모신 예식을 조건으로 결혼을 올리고  딸 내외는 출국을 했다. 아마 몇 년은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오는 환영(幻影)에 시달렸음이 솔직한 고백이다. 이제 사위는 약속대로 가족을 데리고 귀국을 해서 서울에서 살고, 딸아이는 어미가 누리지 못한 온갖 영화(榮華)를 누리며 산다. 어미인 내가 다 부러울 적이 많다. 


  천안에서 올라온 남편도, 퇴근 중이라는 아들도 바로 귀가하라고 이른다. 공연히 딸네 부부를 번거롭게 할 게 뻔하니까. 아니, 좀 더 솔직 하자면 내 사위가 힘들 것이다. 모든 식사는 사위가 전담을 하니까. 나는 서양에선 모두 그렇게 사는 줄로 안다. 다른 서양인들의 사는 모양은 보지도 못했거니와, 내 딸네 부부는 그렇게 사니까. 집에만 들어서면 앞치마 먼저 챙겨 입는 사위가 처음엔 어색했다. 그러나 이젠 달관(達觀)(?)을 해서, 주방에선 나도 곧잘 딸이 아닌 사위를 부르곤 한다. 지금도 주사기를 소독할 냄비와 내 먹이 데우는 법을 일러주고 주방에서 나간다. 손녀 딸아이에게 청을 넣어 내 딸을 부른다.

  “제발. 나 있을 동안만이라도 주방엔 네가 좀 드나들어라.\"

  “오호호호~.”

  딸네 집의 피접 3주가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