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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거 별거 아녀~!(제5회) 항암을 시작하다


BY 만석 2009-07-22

 

1부 제5회


항암을 시작하다


  생각하면 그이도 참 운이 없는 사람이다. 그만큼 배웠고 그만큼 좋은 배경에서, 어쩌자고 보잘것없는 나를 만났을까. 좋은 조건의 상대가 많았다고 하던데……. 그이는 가끔 ‘운명’에 대해서 내게 말하곤 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이미 자기의 운명을 짊어진 채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사 남매를 낳아 기르는 것이 이미 각본에 그려진 대로 진행이 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에 흘려지는 대로 살아야 하고 그 흐르는 운명을 거역하려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일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마 철학을 전공하면서부터 그런 심오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그이는 젊은 시절에, 하던 사업에 몇 번 실패를 하기도 했다. 독일 유학을 포기하면서 전공도 포기한 그였다. 전공과 다른 먼 길을 가자 하니 모두 생소했으리라. 그럴 때마다 나를 만났기 때문인 것 같아서  늘 죄인이 되어 그이를 위로해야 했다.

  “걱정 말아요. 내가 있잖우?!”

  사실을 고백하자면 우리는 든든한 시부모님 덕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큰 시련을 겪거나 밥을 굶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밝으신 내 친정어머님의 계산이 적중한 셈이었다. 물론 잘 나가는 마누라가 있어서 잘 버텨낸다는 주위의 참새들 말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해 두자. 

 

  아이들도 별 문제가 없었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은 건강하고 공부도 잘 하는 아이들로 자라주었다. 한 번도 아이들로 속을 썩이는 일은 없었다. 후반에 양장점이 기성복에 밀려서 사향 길로 접어들 때에는, 아르바이트로 제 아버지의 힘을 덜어주기도 했다. 남매가 한꺼번에 유학을 떠나고 곧 IMF가 터졌을 때에도, 아이들은 한 푼의 생활비도 요구하지 않고 자력으로 공부를 끝내고 귀국했다. 한꺼번에 대학생이 셋씩 되어서 생활이 어려워졌을 때에는, 군에서 장기복무로 대학 학자금을 벌어서 복학을 하기도 했다.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우리 부부를 아이들은 오히려 친구들도 다 그렇게 공부한다며 위로하곤 했다.


  시댁 어른들 이야기도 좀 하자. 1남 5녀를 두신 시부모님들은 오로지 하나 뿐인 외아들을 위해서 일생을 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아들이 대학 시험을 치르는 날 식구 모두가 머리를 빗지 않았다고 했다. 시어머님은 그 외아들 군에 보내시고는 요 위에서 주무시는 일이 없으셨다고도 했다. 끼니마다 아들의 주발을 수북하게 채워놓고, 다음 끼에 어머님이 드시기를 제대할 때까지 계속하셨다고도 들었다. 다섯 시누이들도 부모님을 따라 오빠를 끔찍이도 사랑해서, 덤으로 나까지 남다른 대우를 받고 살았다. 물론 작은 댁 어른들이며 사촌들에게도 우리는 큰 댁 장손이라는 지위가 아니어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고 보면 주위의 친구들 보다 내 삶이 기구하거나 곡절이 많은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순탄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어쩌자고 남들은 잘 비켜가는 식도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왔느냐는 말이지. 옳거니. 한 가지 가능성은 있었겠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서울의 내 집으로 옮겨오신 시어머님께, 지금 생각하면 나는 지독히도 못된 며느리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몸에 이상 기류의 조짐이 보였으나, 신경성위장병이라고만 생각했던 탓도 있었겠다. 그 탓이라는 것이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의 애로라고만 여겼던 게 잘못이었다. 그러니 그 올곧은 시어머님에게 이 못된 며느리 년이 얼마나 살갑게 굴었겠는가.


  어떤 병이든 발병의 이유는 있기 마련이다. 나도 그 발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글이 그만 객설로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예전에 어떤 인생으로 살았는가는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미 자리 잡은 병을 어떤 방식으로 이겨내느냐 하는 문제만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고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굳게 마음먹고,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를 두고 암세포와 치고받고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환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병에 대응하느냐 하는 그 의지라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도 했다. 흥! 말은 쉽지. 도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싸우고 대응을 하라는 말인가.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아무런 의지도 없었다.

 

  의사들이 바쁘게 내 주위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의 손도 이제까지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내 몸통을 잡아먹겠다며 여러 개의 링거 병이 매달려서, 여윈 내 팔뚝에 꽂힌 주사바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점점 무섭다는 고통이 머리를 쥐어짰다. 처음 식도암 선고를 받았을 때에는 그저 멍하기만 했었다. 암의 진행이 3기를 넘어 4기에 들어선다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링거 병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실화가 점점 더 큰 압력으로 나를 욱죄어 왔다. 교수실에서 면담을 요구해 왔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환우들. 그들의 힘없는 발걸음. 표정 없는 얼굴들…… 모두 유령 같았다. 그들의 뒤나 옆에 따르는 보호자들까지도 급기야는 환우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담당교수실에서 정식 상담을 하면서, ‘아~. 나는 과연 큰 병을 얻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교수실의 면담은 나를 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나는 암과의 싸움으로 올인 하려는 참이었다. 내 경우와 같은 암을 치료하는 길은 두 가지라고 했다. 항암치료를 먼저 하고 수술을 받느냐 하는 길과, 아니면 수술 뒤에 항암요법을 쓰느냐 하는 길이라고 했다. 내 경우는 우선 1차로 항암치료로 암을 줄여놓고 2차로 수술을 받아야 좋겠다고. 식도란 녀석은 주위에 아주 중요한 장기들을 많이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암 덩어리를 줄여서 수술을 해야 다른 장기가 안전하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확정적이었으나, 그 뒤의 모든 일이 일사분란하게 확정지어지지는 않았다. 1차의 결과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뒷일은 차차 생각하는 게 정석이라고 했다. 옳거니. 옳은 말이다.

 

  으~음. 이제 그 고통스럽다는 ‘항암’이 시작된단다. 말로만 듣던 항암. 얼마나 큰 고통을 동반하는 것일까.  그러나 항암을 하기 위한 사전 작업(?)도 만만치 않음이 분명했다. 단지 항암을 하기 위한 전초전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예견할 수 있었다. 아니, 의료진이야 늘상 하는 대수술에 비하면 별 거 아니겠지만, 내게는 아주 끔직한 일로 다가왔다. 먼저, 푹 꺼진 내 배통의 어디엔가에 고무호수를 밖아야 한단다. 항암을 위한 체력보강책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는 그 호수를 통해서 수술을 잘 이겨내기 위한 먹이를 받아먹어야 하는 것이다. 주사기를 통해서…….

 

(글 올리는 속도가 느려서 감질난다 하여, 앞으로는 좀 더 속도를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