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였다.
TV에서 뉴스 속보를 보고 난 후부터 눈과 귀는
오직 전하여 주는 소식만 찾았다.
참 뭐라 말 할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마음도 몸도 무기력해져서 할 일을 건성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계속 생각하면 마음이 힘드니까 요가를 하세요.”
그러면서 세빈이는 요가 동작을 시범해 보였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져요.”
여섯 살 어린이의 말에 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베란다의 꽃나무들을 세심하게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어? 이런 이양반이 또 일 저질러 놓았네.”
하고 넘어져 있는 작은 화분을 보며 남편을 탓했다.
그리고 다시 깜짝 놀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두 달 전에 큰 양란 화분의 한쪽 여분위에 작은 화분 하나
올려놓았었다.
아 그랬는데 그 화분 밑에서 양란의 새순이 올라와
작은 화분에 눌려 고개를 못 들고 있었을 줄이야.
난 전혀 생각 못한 일이었다.
그 새순이 드디어 힘을 길렀는지 작은 화분을 밀어내어 버리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 모양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세상사는 게 이거구나.
고개를 들지 못해 제법 자란 몸이 구부러져 있는 양란의 새순.
그 가냘 퍼 보이는 새순도 살기 위해 제 몸 보다
수십 배나 크고 무거운 화분을 기어코 밀어내 버렸다.
동 식물도 살기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건 밀어내 버리고 만다.
어쩌면 세상사는 모든 이들에게 다 잠재해 있는 기본 원칙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제 삼자의 보는 시선에 의해서
이해와 오해가 얽힌다는 것이다.
한 눈에 보고 화분을 떨어뜨렸다며 순간 남편을 오해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보니 양란의 새순이 밀어내 버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웃고 말았던 나 자신처럼.
세상은 그렇게 오늘도 흘러간다.
지금 이 순간도.
양란의 새순처럼.
약육강식은 그래서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