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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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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남편


BY 바다새 2009-04-06

 

촌놈남편

 


간밤의 그림 한 컷이다.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서 뭔가 써본다고 쪼그리고 있었다.

비데가 설치된 안방화장실을 찾아 남편이 서재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온다.

꼭 밤이어야 하고 뿌연 모니터 불빛만 있어야 글이 써지는 야릇한 습관이 있다.

컴컴한 상황임에도 화장실 불을 켜지 않고 변기에 앉는 소리.

이쪽에만 비데가 설치되어있기 때문임을 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화장실 문은 닫지도 않고 볼일을 보는가.

심오한 표정으로 치밀하지 못한 구성의 글을 자책하며 머리 싸매고 있건만, 태연하게 힘주며 쏟아내는 원초적인 소리들.

극과 극의 자세이다.

아내는 이성의 칼날 들이밀고 지적으로 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위치에, 남편인 그는 온종일 쌓인 숙변을 밀어내느라 혈압 올려가며 끙끙거린다. 

묘하게 대조적인 순간을 대하며 쿡쿡 웃었다.

“내가 편한 거야? 우스운 거야? 정말 너무하시네!”

남편의 입은 함구된 채, 변기를 부숴버릴 듯 갖가지 효과음만 들릴 뿐이다.

“뿌르릉..., 뿌지직....뽀옹...,”

고장 난 오토바이가 달리는지 난리가 났다.

“진짜 해도 너무한다! 좀 조용히 싸라! 응?”

아! 부부가 오래 살면 이정도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유독 저 남자만 별난 것이냐.

 


다음날 오후.

산에 놀러가자며 아이들과 나를 재촉한다.

닌자거북이마냥 등짝에 카메라가방 매달고 손엔 호미 두어 개를 챙긴다. 놀러가자는 사람이 농구기는 무엇에 쓰려고.

낮잠이나 자겠다하면 분명 골이 잔뜩 날 것이니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선다.  

설악산과 반대방향으로 행선지를 정했나보다. 차는 고성쪽으로 달린다.

익숙한 나들이가 시작되고 있다. 나는 여전히 가는 곳을 묻지 않는다.


얼마쯤 달렸을까.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이건 그냥 비포장이 아니다. 야생자체의 도로이다.

산악을 달리는 오프로드동호회도 아니건만, 일반승용차로 거친 들을 헤치며 자갈 뒤섞이고 물길 속에 바퀴를 묻으며 돌진이다.   

꺅꺅 질러대는 나의 비명소리와 구시렁대는 잔소리는 자동차엔진 음에 깜빡 묻혀버리고 만다. 간간히 운전석 룸미러를 통해 짓궂게 바라보는 남편의 눈웃음만 보인다.

여기가 어딘가.

몇 해 전 산불로 벌거숭이 된 곳에 도착하여 무조건 내리란다.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다 작은 시내위에 징검다리도 건넌다.

내리쬐는 한낮 봄볕이 따갑다. 콧잔등엔 땀이 송송 맺힌다.

몸이 늘어진다.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만큼.

딸과 아들 녀석도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좋아 날뛰는 놈은 흰둥이 견우뿐이다. 입가에, 앞가슴에 검불이 달라붙고 다리엔 벌써 진흙이 덕지덕지 붙었다. 갇힌 견공신세였으니 신나기도 하겠구나.


“저 꼭대기까지만 가자! 자, 빨리빨리 와.”

남편의 말에 딸아이가 투덜거린다.

“아빠! 뭐야. 지금 가족들 데리고 극기 훈련이라도 하는 거야?” 

가시나무가 손에 닿는다느니, 신발 속에 모래 한줌이 들어갔다느니 종알거린다.

아직 봄 산은 메마른 겨울 홑껍데기들이 수북했다. 연초록을 보기엔 이른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땅만 보고 걷던 내 눈에 분명 보랏빛이 반짝거렸다.

“여기 좀 봐! 이거 바람꽃인가? 어이! 사진기사 뭐해? 빨리 찍으라구!”

앞서 걷던 남편이 걸어왔다.

“근사한데..., 노루귀다!”

맞다 노루귀였다. 꽃잎의 생김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군데군데 하얀 노루귀도 보인다. 올봄에 만난 첫 야생화손님이다.

마른 갈색 잎이거나 잡풀들 냄새가 구수했다. 땅 아래 솟아날 연두의 꿈틀거림도 감지되었다.


돌아오는 길.

너른 바위 펼쳐진 계곡 가에 앉아 잠시 쉰다. 준비해간 음료와 간식거리를 챙겨주니 먹고 난 딸아이가 벌렁 드러눕는다.

“아, 좋다!”

딱 그 말, 좋다는 한마디인데 남편의 표정에서 행복이 읽혀진다. 손바닥 모아 퍼 마신 물맛도 달다.

새순이 움트기 시작한 버드나무 한줄기 꺾어 버들피리를 만든다. 연장과 도구가 없으니 누군가 버리고 간 소주병뚜껑이 칼 대신 요긴하게 쓰인다.

가족 넷이 바위에 걸터앉아 버들피리를 불어댔다.

인공의 냄새, 문명의 혜택 따위는 일찌감치 벗어버리고 자연인이라도 된 모양새로 누려 본 충분한 안식이었다.

              

이제 다시 일상의 집으로 간다.

챙겨온 호미의 역할을 감행 할 차례이다.

포장도로 달리다 논둑 발견하고 아이들을 차에 둔 채 내린다. 냉이, 씀바귀, 고들빼기, 민들레잎사귀....., 봄나물을 뜯었다.

더 욕심내지 않고 꼭 한 끼 거리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자연이 대가없이 베푸는 초대에 도를 넘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보금자리로 돌아와 나물을 다듬었다.

고추장 불고기를 재우고 냉이 넣은 된장국을 끓였다.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들도 있었다. 봄의 향연이다.

착한 남편은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욕실에서 아들과 흰둥이 강아지 녀석을 씻긴다.

오붓하게 모여 앉은 식탁에서 남편이 한마디 내민다.

“오늘도 글 쓸 거지? 제목은 ‘촌놈남편과 살아서 행복해요!’라고 해라! 알았냐?”

자신이 촌놈인걸 알기는 아나보다.   


저녁상 물리고 엊그제 뜯어온 씀바귀를 다듬어 준다.

소금물 붓고 쓴물 우려내어 김치나 장아찌를 담그려 한다.

계속되는 남편의 자화자찬에 눈을 흘긴다.

“나 같은 남편 나와 보라 그래. 낼 출근해야 하는데 이런 거 해주는 사람 있어?” 

당연히 없지요.

아내 앞에서 화장실 문 열어놓고 뿌지직 거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자기얘기 잘 써달라며 갖은 아부 떨다가 잠이 들었다.

남편이 말해준 제목이 길어 그냥 ‘촌놈남편’으로 정했다. 

쓰다 보니 사족도 붙고 지루하기도 하다. 역시나 익숙해진 사람이야기는 적을게 없나보다.


그나저나 막돼먹은 남편의 괄약근도 문제지만, 시도 때도 없이 가스가 부글거리는 나의 아랫배도 큰 걱정이다.

자다가도 뭔가 새나가는 기분에 슬쩍 잠이 깨기도 한다. 내 소리에 내가 놀라 깬다는 말이다. ‘뿡!’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대포 터지는 소리도 있었다.

꼬투리잡기 즐겨하는 이 남자가 듣는 날엔 분명 여러 말이 오갈 텐데.


움켜쥐고 참아야 하느니라.




2009년 4월 5일 가족 봄나들이 다녀온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