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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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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도 병인 양하여


BY 바다새 2009-03-31

 

다정도 병인 양하여

 


 

처음엔 오지랖이 넓은 것이라 변명하고 살았다.

유난스런 내 성격을 주위에 익숙해진 이들은 일찍이 체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위 양심에 어긋나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 여겨지면 가만있지를 못한다.

슬슬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정도가 엷어지기는 했으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본질이야 어디 가겠는가.


얼마 전에도 결국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시내 동사무소 아동복지과 여직원의 불친절한 언행을 참지 못한 채 발끈하여 시청에 불편사항전화를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싶어 전자민원센터를 이용해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불쌍한 누구네 누이이거나 귀한 딸이거니 넘어가려 했으나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건대 작은 충고도 소중이 여겨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따끔하게 알려주어 또 다른 피해자가 없도록 하는 거룩한 희생정신에 입각한 태도가 바로 나 자신인 듯 우쭐해졌다.

시일이 지나 회신이 왔고 동사무소 직원은 처음에 보였던 말투와 달리 나긋하고 부드러워졌다.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그 정도쯤이야.


이십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나의 정의로운 불굴의 투지 오지랖은 극에 달해있었다.

일행들과 걷던 중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부부를 보게 된다.

남의 일이고하니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을 문어발식 안테나에 이미 감지되었으므로 간섭을 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큰소리 꽥꽥지르며 윽박지르는 남자에 비하여 부인인 듯한 여자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만화영화 세일러문의 외침처럼 속으로 주문 외우고는 대로를 건너갔다.

“아저씨! 부인이신 것 같은데, 왜 아줌마한테 소리 질러요?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부끄러운 짓 하신대요? 약자를 보호해줘야지요. 비겁하게 스리....,”

지금생각하면 낯 뜨거운 상황이다. 얼굴이 벌겋게 흥분했던 남자의 뜨악한 표정이라니.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조폭과 마누라의 다툼이었다면? 뒷감당을 어찌하려는가.


일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별명이 수도꼭지인지라 툭하면 운다. 울어야 할 일에 눈물이 쏟아진다면 자연적인 현상이라 설명되겠지만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 일에도 잘 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우는 일에는 그런대로 감수성 풍부하다느니 영혼이 맑다느니 그럴싸한 표현이 붙는다.

허나 지나가는 어린아이가 불쌍하게 생겨 울기도 하고 봇짐지고 가는 할머니 허리가 힘들어 보여도 울어댄다.

어쩌다 가끔 흘리는 여자의 눈물이 아름다운 것이지 그야말로 징징거리는 수준이니 남들이 보는 내 꼴은 철들지 못한 사십대인 것이다.  


아침나절 지인의 병문안을 갔었다.

연세 지긋하신 분이었고 어찌 보면 형식적인 문병이기도 했다.

병실안의 여섯 개의 침상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꼬부라져 누운 환자를 보게 된다. 코에 호스까지 연결하고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금방 쾌차할 것이다, 별거 아닐 거다 위안을 드려도 부족한 마당에 콧물까지 추하게 풀어대며 울어버렸다. 쳐다보는 보호자에게 미안한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이미 얼굴엔 뜨거운 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병은 나에게 있는 거다. 이런 추태가 어디 있겠는가.


여섯 해 전인가. 나의 졸작수필이 모수필문학회 신인상에 뽑힌 적이 있었다. 수상한 일을 자랑하고픈 게 아니라 심사평을 써주신 분의 내용이 떠올라서 일부 옮겨본다.


‘생애 내내 앓아 왔고 앞으로도 앓아야 할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는 그러니까 치유가 불가능한 무엇을 그리워하는 만성적 지병을 심하게 앓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리운 것들을 향한 그리워하기가 시와 소설과 수필을 낳기 때문이다. 그녀의 지병은 중환자실 산소 호흡기로도 어쩔 수 없도록 더 많이 아팠으면 한다.’


그분의 정확한 진단대로 나는 만성적 지병을 앓고 있었던 듯하다. 더 많이 아프기를 바란다던 표현만큼 제대로 아프고 있는 중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면에 시달리고 눈물짓는 밤이 계속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충해왕 때 지은 이조년의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흔히 외웠던 것이었다.

봄밤에 잠 못 들어 하는 심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휘영청 밝은 달빛과 하얗게 부서지는 배꽃.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두견새만 맘을 아는지 슬피 울고, 다정다감한 것이 병이라도 되는 듯 잠들지 못 하노라 한다.

구구절절 꼭 내 맘만 같구나.


온종일 비 내려 질척하게 봄은 익어만 가는데, 가슴에 뜨거운 똬리를 틀고 내려앉은 설움 한 덩이 탓에 깊은 밤....., 잠이 오질 않는다. 

정이 넘치는 것도 병이긴 하다.




2009년 3월 31일 잠들지 못하는 봄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