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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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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버지...(6)


BY 솔바람소리 2008-10-28

내 나이 4살이었다던 그 당시...

나는 지금도 그 시절, 내 몸의 몇 번째 척추

뼈에서부터 이상이 시작됐는지 모른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벌써 한 개의 뼈는 완전히

썩어 버렸고 다른 몇 개의 뼈들도 이미 썩어

들어가는, <척추결핵>으로 진행 된지 꽤 오래돼서

좋은 결론을 얻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엄마가 가슴 아파할까봐 그 일에 대해서

굳이 궁금증을 이유로 묻지도 않았다.

어쨌든 내 장애는 분명히 아버지 이부동생의

부주의한 과실로 비롯되어서 놔두면 죽고 수술해도

장애자가 된다는 막막한 상황에서 딸을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던 내 엄마의 고집대로 수술을

진행시켰고 의사의 예견대로 큼직한 척추의 수술상처를

따라서 서서히 등이 굽어가는 곱사등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집애가 장애를 갖고 살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보내고자 했던 아버지의

말을 거역했던 엄마에게 내 아버지는 그때부터

체벌 같은 폭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딸의 수술비로 쓸려고 빌렸던 돈 따위를 갚은

생각도 않고 일해서 받은 돈으로 외박을 일삼으며

술과 노름으로 탕진했고 며칠만에 들어오면 시시때때로

고열로 시달리며 의식을 잃는 내 병간호로

지칠 때로 지쳐버린 엄마를 향해서 서슴없이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던 아버지셨다.

 

-“너 때문에 니 애미가 그리 산거야...”

이모의 푸념은 내가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모의 말이 내겐 그리 해석되었다.

하긴, 내가 없었다거나 죽었더라면 내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런 대접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테지.

나로 생겨난 모든 불상사였다는 이모의 말은 그래서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같은 심정에 자라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에게 사람이하로 대하는 남편의 주먹질 앞에서 어쩌면

내 엄마도 나를 살린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아파서 누워있기라도 하면 평소 말없던 아버지는

심통이 난사람처럼 더 굳게 입을 닫으셨다.

그럴 때면 엄마는 아픈 딸을 보랴 남편의 눈치를 보랴

좌불안석이었다.

그리고 집 밖에 화장실로 자주 들락거렸다. 나는 시험시간이

다가오면 긴장해서 배가 아픈 것처럼 엄마도 많이 무서워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에게서 아버지처럼 담배냄새가 나곤했다.

 

술만 드시면 폭력성을 보이던 아버지셨기 때문에 맨 정신의

아버지는 그래도 안도할 수 있었던 나였는데 그 마저도

오산이었다.

점심을 드시러 잠깐씩 들르던 부모님이셨다. 그날도 점심을

잘 드시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시나보다며 숙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술 한 방울 안 드신

아버지가 엄마에게 해대는 심한 욕설들이 들렸다.

내 심장이 철렁하는 사이 엄마가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로 끌려 들어오셨다.

 

“이 씨X년이 피지 말라는 담배는 왜 자꾸만 피워!!!”

 

왜 자꾸만 피우냐니, 엄마가 진작부터 담배를 태우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밖에 다녀오신 엄마에게서 났던 담배냄새가

이해될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내 엄마가 여자는 해서는 안된다는

담배를 폈다는 사실을 나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아버렸을 때는 이미 중독이 되있던 엄마셨다.

딸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던 엄마가 내 부탁에도

담배를 끊지 못하셨다. 하긴, 아버지의 매 앞에서도

끊지 못하던 담배였으니... 어린 나였지만 엄마는 담배만

피우면 속상한 기분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나보다고

엄마의 ‘비밀’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날 이후부터 나는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가

담배를 태우면 자연스레 망을 보고 있었다.

저만치서 아버지가 보일라치면 일부러 큰 소리로

“아빠!!! 오늘 고기 많이 잡았어?!” 하는 괜한

호들갑으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생각하면 그 나이에 참으로 맹랑했던 ‘나’였던 것도 같다.

눈물을 흘리는 엄마에게 때로는

“엄마, 담배 피우고 울지마.”

하며 먼저 권하기도 하는 못된 딸이기도 했다.

엄마가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고 늘 바랐던 나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겠지...

 

-그렇게 치열한 눈치를 보며 담배를 태우던 내 엄마는

지금도 담배를 끊지 못하셨다. 하루에 몇 갑씩 태웠던

아버지가 몇 해 전 갑자기 금연을 선포했고 머지않아

그 중독에서 벗어나서 엄마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도 끊었으니까, 당신도 끊어봐.”

그 말씀에도 엄마는 아버지도 해낸 금연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아직도 몰래 태우고 계신다. 지금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시는 듯하다.

그 못됐던 아버지가 점차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더니 엄마를

더는 물려고 들지는 않으셨다.-

 

내가 본 엄마는 밟히면 밟힐수록 힘차게 뿌리내리는

잡초 같았다. 좌절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 따윈 더더욱...

아버지의 무차별한 폭행에 몸을 숨겨야 하는 순간에도

곁에 사는 이모에게 달려가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셨다. 밤눈도 밝게 어두운 길을 걸어서

산으로 들판으로 으슥한 마을 창고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데리고 잘도 몸을 숨기셨다.

그런 날 밤마다 <너 때문에 산다>를 읊어대셨다.

나 때문에 산다는 엄마를 위해서 나 역시

엄마 때문에 버텨야만 했다. 엄마를 기쁘게

하기위해서 공부를 했고 누구에게도 밀리지

말아야 했고 져서도 아니 됐고 동생들도 지켜야만 했다.

친구들이 고무신을 끌고 다닐 때, 나는 빨간 구두를 신었다.

학교에서 제일 먼저 손목시계를 차기도 했다.

김치와 고추장, 된장으로 반찬을 싸오던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던 나는 늘 뼈를 위한 멸치와 뱅어포는

기본으로 쏘세지와 계란후라이, 장조림 등을 반찬으로

들고 다녔다.

내 옷은 늘 공주님 옷처럼 예쁜 리본이 달린 원피스였다.

외할머니와 살기 전에는 4km나 떨어진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한 번에 버스표를 100장씩 끊어주셨지만

알뜰한 엄마를 닮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 길을 걷곤 했다.

버스표가 20원 했을 당시 내 호주머니에는 늘 엄마의

권유로 오백원짜리 지폐가 기본으로 1장씩 들어있었지만

친구들이 오물거리는 <라면땅>이 먹고 싶어도 참고

내 용돈 헐며 군것질 따윈는 하지 않았다.

그런 딸을 맞으려고 바다에서 있어야 했던 엄마가

어느 날부턴가 맞은편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몇 번 걸어오고부터는 매일매일

나를 데리러 그 먼 길을 달려오셨다.

 

“왜 또 걸어와? 엄마가 버스를 타고 오랬잖아.”

 

숨찬 목소리로 나를 탓하듯 말씀하셨지만 땀이 흐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새하얀 이를 들어 내놓고 웃고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꽃이 예쁘게 핀 산길을 걸었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떨어지는 그 길을

새 다리처럼 가는 다리의 딸을 업고서 내 엄마는

급한 발걸음을 옮기곤 하셨다. 차비보다 더

비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딸은 행복하게

조잘대며 엄마 등에서 행복하기만 했다.

어느 날은 걱정하는 엄마 때문에

아픈 몸을 숨기고 등교하던 하교 길에

차마 걸을 수 없는 녹초가 된 몸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차 창밖으로 흙먼지 속을 달려가는

엄마를 보고 중간에서 내려서 엎여 오기도 했다.

엄마는 딸이 말 안 듣고 힘들게 걸어 올까봐 달려오시는

그 길로 딸은 이제 버스가 타고 싶어도 엄마가

걸어오고 있을까봐 걱정돼서 걸어야만 했던 웃지 못 할

해피닝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