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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그리고 남자


BY 선물 2008-10-27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처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지금까지 살며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
그 시간들의 여린 속살 하나하나를..

한창 사랑에 달 뜬 그때, 그대 내게 했던 말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내가 말해줄게.
아주 늦은 밤이었어.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 있었고, 당신은 당신 책상 앞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지.
얼른 나를 데리고 가서 책을 보는 당신 옆 침대에 나를 두고 싶다고.
그러면서 포옥 한숨 내 쉬었지. 그 시간 자기 옆에 내가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래, 어쩜 나도 그때 그대 생각으로 뒤척였던 것 같아.
나도 책상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당신을 보며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책이나 읽었으면. 그랬으면... 그랬던 것도 같아.

지금 생각하니 우습긴 하네.
어째 당신이란 사람 입에서 그런 간지러운 말들이 나왔을까. 너무 신기해.

그런데 당신 그랬던 기억이 전혀 없다고 했지.
나도 꿈을 꾼 건 절대 아니거든.
당신 쑥스러워 발뺌하는 거야?

63빌딩에서 김치전골 먹을 때 일도 그렇게 오리발 내밀 건지 궁금하네.
자글자글 전골 냄비 속 고기를 다섯 점 내 밥 위에 얹어주었지.
그러며 내게 그랬어.

-이렇게만 낳아줘.
아이 다섯을 낳아달라는 말이었어.
그 말을 듣고 난 놀라기보단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지.
그대 맘에 꼭 드는 여자이고 싶었거든.
실제로 많이 수줍기도 했어.
그래서 내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얼굴 붉히며 아이, 왜 그러세요. 몰라요. 그랬던가.
아니면 네, 좋아요 라고 했던가.
그 어떤 대답이었다 해도 지금 생각하니 오스스 소름이 돋네.
유치하면서도 마냥 좋았을 그때 우리 둘.

당신은 4녀 1남 막내며 독자라서 명절이면 늘 외롭다고 했지.
그래서 아이들로 바글거리는 집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
혹 아들 몇을 낳게 되면 그중 신부님도 꼭 나왔으면 했고.

나도 알아.
당신 단 한 번도 뜨겁게 날 사랑한다는 고백하지 않았어도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그런 맘이 느껴졌어.
어머님이 그러시던데 뭘.
당신은 아주 사소한 결점 하나에도 휑하니 마음 돌아서는 남잔데 나한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더라고.

그랬을 거야.
그랬으니 결혼이란 걸 했겠지.
그 무섭고 엄청난 일을.
눈에 뭐가 씌지 않고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일. 결혼.

그리고 당신 참 든든해보였어.
형님들 다니는 미용실에 날 데리고 갔던 기억 나?
아주 유명한 고급미용실이었어.
난 많이 부담스러워했지.
그랬더니 자기가 그랬어.
앞으로는 이런 미용실에 다니게 될 거라고.
사실 그런 사치는 내 정서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어.
그래도 고맙고 미더웠어. 자신감 넘치는 당신이 든든하고 보기 좋았어.
그뒤 한 번도 그런 곳에 안 가고 또 못 갔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지.

문제는 다른 것들이었어.
우린 결혼을 바로 앞두고부터 사소한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예민해지기 시작했어.
그래도 결혼은 진행되었고 힘들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잘 극복해왔어.
시시콜콜한 사연들은 생략할게.
괜히 맘만 다칠 것 같아서.

얼마 전 책상 앞에서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자기를 봤어.
그 뒷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던지 순간 사랑하는 맘이 팍팍 생기더라구.
좀 거룩해도 보이고 참 보기 좋았어.
그래서 내가 다가갔지.
빳빳하게 굳은 목 근육이나 내 손으로 조물조물 풀어줄까 해서.
근데.....
순간 내 손이 닿자마자 자기가 쓰던 글씨가 빗나가게 되었나 봐.
갑자기 화를 내더라구.
온갖 짜증 다 묻은 목소리로.

난 너무 당황했어.
어쩔줄 몰라하며 자기 눈치를 보았지.
자기는 수정액을 찾더니 성의껏 다시 글씨를 고쳤어.
그리곤 옆에 있는 내 존재는 잊은 듯 다시 성경을 필사했지.

솔직히 등이라도 찰싹 한대 때리고 싶었어.
그때 나, 눈물이 났거든.
무안하고 민망하고 서럽고 뭐 그런 감정들.

그래도 때리지 못했어.
또 글씨 망치면 안 되니까.
난 그냥 살짜기 방을 나왔어.
그리고 속으로 그랬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어쩜 우리 진짜 화성에서 온 남자고 금성에서 온 여잔가 봐.

언제나처럼 호수공원에 운동하러 갔던 날이야.
막둥이 데리고 나와 함께 호수공원 한바퀴 도는 게 자기에겐 큰 낙이란 걸 나도 알아.
하루는 동네엄마들에게 말했어.
난 운동하기 싫은데 안가면 자기가 무지 화내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간다며 힘들어 못살겠다고.
그랬더니 다들 그러더라.
내가 이상한 거라고.
자기들은 거꾸로 남편하고 같이 운동하고 싶은데 도대체가 게을러서 그게 안된다고.
우리 나이에는 절대적으로 운동이 필요한데 남편이 그렇게 끌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도 하고.
그 말을 들으니 좀 그런 것도 같았어.
하긴,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12층 아주머니가 볼록 나온 내 배를 보고 아기 가지셨어요 라고 했었지.
자기도 알고 있지. 나 소변만 보고나면 나왔던 배가 쏙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아니긴, 진짜야.
그때 쓰레기 비우고 와서 화장실 가려고 했는데 아줌마가 하필 볼록해진 내 배를 보고 말았던 거야.
아니,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을 해.
사람들이 그래서 그 분을 주책 아줌마라고 하나봐.
그래도 내 배가 심각해진 것은 사실인가 봐.
그러니 정말 운동은 해야겠지.
그래, 생각해보니 그건 고마운 일이네.

근데 호수공원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
나 그건 좀 속상해.
한 바퀴는 정말 부대끼거든.
난 힘들어서, 정말 순수하게 힘들어서 자기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그러려고 했던 거야.
뭐 다른 먹은 맘이 있을 게 있기나 해?
근데 그때마다 당신 하는 말.
이런 데서 그렇게 다니는 사람들 다 불륜이야!

애걔걔.
그럼 저기 저 노인 분들도 불륜이네.
저 점잖게 생긴 중년 부부도 불륜이네.
저 젊은 새댁 부부도 불륜이네.
불륜이 왜 저렇게 보기가 좋은 거야?

그건 네 사고방식이 엉큼해서 그런 거야.

그래, 나 음흉하다.
근데 나 불륜 너무 짜릿하다.
불륜 좋으니까 우리 손 잡고 팔짱 끼고 허리 안고 그러자. 그렇게 하자.
종종종 가쁜 숨 쉬며 자기 따라다니는 나를 당신은 간단하게 외면하지.
근데 당신 그 입술은 왜 슬그머니 위로 올라가는 거야?
당신도 내가 이렇게 달라붙는 게 은근히 좋은가 보네.

당신,
어젠 나도 좀 속상했어.
왜 자꾸 안에서 문을 걸고 혼자서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그러다 얼핏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낯설어서 내 맘이 서늘해지곤 해.
열쇠를 찾아 방문을 열 때 난 정말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
힘들면 힘들다 하고 화나면 왜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 말하면 안 돼?
도대체 그 속에 뭐가 있길래 항상 그렇게 터질듯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거지?

예전에 우리 동네 미용실에 같이 간 적 있었지.
그때 어떤 분이 그러더라.
두 분이 부부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아저씨는 너무 점잖게 새겨서 그런가,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보여요.
어쩜 나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린지도 몰라.
근데 정말 기분이 안 좋았어

내 눈엔 자기가 아직도 근사한데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질 않나 봐.
솔직히 난 자기 외모보고 반했거든.
근데 그게 아닌 게 되어 버리면 좀 아쉽잖아.
그러고 보니 어쩜 자기 늙은 것도 같아.

나, 오늘 내 손으로 처음 머리 염색을 했어. 더 이상은 봐주기가 힘들었거든.
눈에 보이는 부분만 겨우 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부분이라도 까매서 좋아.
어쩜 나중에 자기 머리도 염색해 줄 수 있을 거야.
머리 하난 자기가 나보다 그래도 젊은 거네. 다행이야.

젊은 새댁일 때 당신이 내게서 떠나고 싶어했던 적이 참 많았지.
그게 진심이 아니라고 믿고 나는 못 들은 척 했어.
나이 들면서 그런 말도 쑥 들어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당신 다시 그 병이 도지나 봐.
자꾸 훌훌 떠나고 싶어 해.
그래, 당신은 신부님이나 스님이 딱이야.
그랬으면 행복했을 거야.

그래도 부디 옛날 나를 옆에 못 둬서 한숨 폭 내 쉬던 때를 기억해 내봐.
모른다 하지 말고.
자기 힘들다고 자꾸 그런 말 하면 나는 무너져.
고급 미용실 같은 데 아니라도 자기랑 같이 동네 미장원 가고 공원에 가고 강아지랑 장난치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 만으로 난 좋은데.
자긴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가 봐.
내가 가진 사랑으로는 안되나 봐.

어젠 잠긴 방문을 그냥 열지 않고 당신 스스로 열고 나오길 기다렸어.
아주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덜컥 문은 열리고 자기 모습이 보이더라.

나 철없어서 그런지 그 순간 자기를 막 만지고 싶었어.
손가락 하나하나, 주름 잡힌 뺨, 반듯한 이마 모두를 만지고 싶었어.

나 안아줘. 그렇게 내가 말했지.
아주 형식적으로 날 뻣뻣하게 안는 당신.
어쨌든 또 한고비는 넘어가나 봐.
이렇게 아주 힘들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당신과 나, 같이 많이 늙었으면 해.
고단하게 감당해야 할 시간들을 훌쩍 건너뛰었으면 해.
그래서 그냥 흰머리 염색이나 서로 해주고 책 읽을 만큼만 눈 밝게 살았으면 좋겠어.
당신과 아픈 상처 더 만들지 말고 좋은 일만 기억하며 그렇게 살다 갔으면 참 좋겠어.

세월은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줄 거야.
우리,
그저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