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708

삶이 속일지라도 8


BY 그림이 2008-10-19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복과 화를 한사람에게 몽땅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 한다.

나는 남들이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주식 공모주를 해서 참 재미를 보았다.

경제신문을 꼼꼼이 읽고 공모주 신청하는 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청약하고 왔다.

주위 사람에게 권했지만 모두 거들떠보지도 아니해 혼자 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다 남편이 그렇게 낭비벽이 심해도 그렇게 돈을 벌면 자랑이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입이 방정이다. 내가 봉급 이외 것 번만큼을 쓰고 와도 그런 실수는

계속이 되었다. 아이들이 중학교2,3 학년 때라 기억이 된다. 교재를 팔아 수입이

짭잘 해 좋아했는데 돈을 받으러가니 벌써 남편이 몽땅 받아 가버렸다.

3~40만원하는 교재 한질을 팔면 30%를 줬다. 그것을 2~30질을 팔았으니

80년도 중반기 때 돈을 따지면 거금이다. 그 직후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남편이 병원에 실려 갔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놀라지 아니했다. 아니 놀라기보다 차라리 죽고 없어지면 편하리라 생각했다.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타고 갔다. 곁에 선생님들이 있어도 나는 놀라지 않고

덤덤했다. 그중에 어떤 선생님은 나를 이해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하도 사표를

자주 내어 사모님 정말 힘들겠습니다. 했던 선생님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내 능력을 안다. 남들이 일일이 계산해 힘들 게 하는 일을

나는 조견표를 만들어 쉽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요즈음 컴퓨터

엑셀 능력이다. 봉급체계가 잘못된 걸 지적해 옛 재무부 본사로 넣어 항의했더니

너무 방대한 문제라 창장이 나를 불러 본청장이 온 공문을 나의 게 보여 주면서

서서히 해나가자고 했다. I M F 때 명퇴 바람이 불어 본사지사 200여명이 나왔다.

나오고 보니 명퇴수당이 잘 못 지급이 되어 같은 조건인데 돈이 달라 국세청과

본사의 항의해 억대의 돈을 받아내어 퇴직자들에게 빤짝 스타가 되기도 했다.

집을 팔았는데 세무사가 계산해 주는 양도소득세가 내가 계산한 것과 달라

거금 백만 원을 물지 않았다. 컴퓨터에 검색해 배운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학교에서 시험만 쳐오면 나는 점수 매기는 것부터 시작해

통지표를 깔끔하게 다 작성해 주었다. 내가 처음부터 버릇을 잘 못 드린 면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은 학력까지 속이면서 결혼을 결점이 있는데다

멍청한 여자 같질을 안아 처음부터 잡을려고 했고 주위서도 잡으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85 년 말 친정어머니가 얼굴

안색이 안좋아서 이상하다고 여겨도 독감이다. 체했다. 그 기간이 너무 길어

병원에 갔더니 왜 이토록 몰랐어요. 간암 말기 입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그대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엄마의 기반으로 딸이 살겠다

싶으니 엄마의 청천벽력은 나는 세상 아무것도 싫었다. 동생은 집을 장만하고

제부가 박사과정에 있어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돈을 대고 동생은 몸수고를

했다. 임종을 예감하신 어머니는 기어이 병원에서 퇴원을 해 오빠가 사는

제천으로 가려고 하셨다. 오빠가 오셔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셨다. 일주일 후

토요일 시간을 맞춰 제천가기로 동생과 약속을 했다. 퇴근 후 소재 빨래

다하고 가려니 오후 5시 차표를 사서 갔다. 엄마는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어

하실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튼 날, 출근해야 하는 나는

울면서 동생과 내려왔다. 마자막이 될지도 몰라 아이들도 데리고 갔다.

마음이 착찹함을 어쩔줄을 몰라 집에 들어서는데 남편은 재뜰이가 마당에

날라온다. 이유인즉 반찬준비 안하고 제천간 게 화근이다. 장모가 어떻더냐고

안부도 묻지않고 하는 남편의 행동은 짐승도 아니였다. 나도 그때는 악을

쓰면서 달려들었다. 외박을 밥먹 듯 하면서 왜 집에서 꼭 밥을 먹어야 되느냐고

그대는 이웃도 옆방도 눈에 보이질 않았다.이런저런 사건을 시어머님께 그대로

이르는 남편이기에 시어머니는 곁에 없어도 내가 엄마한테 간 줄을 아셨다.

싸움을 해도 한 번 더 엄마한테 가고 싶었다. 그 다음 토요일 시어머님이

전화가 온다. 내가 울산에 있으니 너가 여기 오너라. 울산은 맏조카집이다.

하도 기가차서 엄마한테 갈까봐 선수 치는 시어머님이 야속했다. 방 도배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래라. 지금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틀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들한테 전화를 받은 어머님 너거 우애 살래 내 어께가 꺾인 기분이다. 사돈이

너거 한테는 큰 힘 이였는데 내 귀에 그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가시기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가셨다. 남편도 어머니 영전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

그 모습도 나는 곱게 보이지를 않았다. 9개월 후 오빠가 돌아가셨다. 오빠 없는

어머니의 첫 제사를 지내려가는 맘은 한없이 아팠다. 제사를 지내고 오니

남편은 또 사표를 내었다. 죽이고 싶었다. 학교 교장에게 울면서 사정했다.

우리 사정을 잘 아는 선생님이 사모님과 의논을 안했지 싶습니다. 의논해서

사표수리 합시다. 하고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기어이 선생이

하기 싫단다. 대책이 없었다. 울면서 내가 시어머님께 전화했다. 대뜸 하는

말씀이 니가 왜 너거 엄마 제사갔노 니가 제사 가니 애비가 사표 낸 거

아이가 위로 받으려다 혹을 붙인 격이다. 그때 나는 울면서 달려 들었다.

어머니 시집 온지 16년 만에 친정제사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아버지제사

섣달 29일이라 한 번도 참석 못했는데 제사 참석한 게 내 잘못입니까?

그러면 시누 세분 아버님 제사 때 마다 오시는 거 돌려보내지 왜 해마다

오게 놔 둡니까? 전화를 딱 끊었다. 돌아서서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가

우신다. 내 니한테 사과 하마 니 애먹는다. 내 자식이지만 죽이고 싶다.

하도 애가타서 너한테 퍼부었구나! 사돈이 어떤 사돈이냐 너거 살도록

만들어 놓고 가신 분 아니냐? 내가 너무 잘못했다. 예 알겠습니다.

시어머님도 남편 땜에 무지하게 속을 썩이고 돌아가신 분이다. 남편은

결국 7년을 남겨두고 누구도 환영 하지 않는 사표를 한마디 의논 없이

던져버렸다. 다 지난 이야기다. 시댁에서도 우리 사정을 거의 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90이 다되신 시누이도 아들 차를 타고

병원에 오셨다. 한 분도 빠짐없이 병원을 찾으셨다. 아팠던 만 큼

위로도 받는다. 고통이 다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도

아이들이 빗나가지 않고 남들 같이 커 주었다. 내가 이혼을 했더라면

애들이 어떻 했을까? 절대로 내가 키우도록 그냥 두질 않을 집이다.

엄마의 아픈 것을 보고 큰 아이들 힘들었지만 잘 커주어 나도 고맙다.

남편 아픈 나를 두고 대성통곡 하면서 집집마다 전화를 건다. 내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긴 세월을 통해 한다. 그렇다 병은 애먹인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줄줄이 암으로 가신 친정 엄마 아버지 오빠, 유전적인

요인도 있다. 처가 댁 수명 잛은게 남편의 평소 불만이었다. 지금 나는

가만히 있다. 남편이 소재 빨래 이부자리 펴고 개기 혼자서 다 한다.

산에 들에 다니면서 좋다는 거 다 해온다. 채소 손수 가꾸어 아내에게

먹이려고 채전을 부친다. 이혼을 했더라면 바쁜 세월에 어느 자식이

이렇게 나를 돌봐줄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훗일을 위하여 고통을

주셨나 싶기도 하다. 담당의사 선생님이 경과가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이 또 꾸우벅 절을 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꼭 나아야해 그래야

내가 한이 안되지 노심초사다. 잃어버린 세월이 허무하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세월은 너무도 소중하다. 그 소중한 날들을 남편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사람의 한평생은 나름대로 드라마틱하게 산다. 한편의 드라마처럼 살아온

지난 세월들을 지금 이렇게 아컴에 올릴 수 있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어제께 돈 백 만원을 뚝 잘라 성당에 가지고 갔다. 너무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쓰 달라고 복지회에 바쳤다. 엄마의 유언이기도 하다.

엄마는 가시면서 양노원에 대형 냉장고를 사서 보내셨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값있는 돈을 쓰라고 그때는 동생이 어려울 때 동생 주지 않고 양로원에 냉장고

사서 보낸 다고 엄마한테 나무랄 때 엄마 말씀이 잊어지질 않는다. 공무원 먹고

살 만큼 나라에서 돈 준다. 자식 잘 살도록 돌보려면 끝이 없다. 너도 너무 자식

사는데 매달리지 마르라.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부모 노릇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아이들을 불러 놓고 얘기했다. 엄마는 너거 키울 때 남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았다. 지금부터 나도 조금은 그 도움을 갚아야겠다고 느낀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들이 서운해 하지를 마르라고 하니 큰 아이도 작은

아이도 그러라고 한다. 나를 도와 준 사람들 한 분 한 분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사업실패로 갑자기 망해버린 언니에게 도와주려니 보험을 넣어 달란다.

나도 보험을 거금 넣고 소개도 시켜 주었다. 그 언니 아이들 옷과 유아기구는

내가 다 받아썼다. 체구가 비슷한 언니는 옷도 내 입으라고 주었다. 그런 언니가

도움은 싫다고 했다. 아들 결혼식에 거금을 축의금으로 냈다. 화를 낸다. 셋집에

사는 언니지만 자존심은 대단하다. 나도 사람값 좀하게 그냥 봐 달라니 고맙다고

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더 많다.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나는 행복하다. 아컴 동료들 제 글을 읽어주신 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나도 여러분께 이런 못 난 글을 끄적이도록 이런 사이트를 마련해 주신

짱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