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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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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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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속일지라도 7


BY 그림이 2008-10-14

아이는 여섯 살 일곱 살 때도 하는 짓이 예사롭질 않았다. 나는 여섯 살짜리를

 아이로 취급하지 않고 아주 큰 아이 만냥 심부름을 시켰다. 요즘처럼 자동이체가

되질 않았을 때 세금을 제때 낼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여섯 살 먹은 큰 애한테

영수증과 돈을 주면서 은행에 가서 내라고 했다. 돕바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저녁에

 퇴근하니 “엄마 나 오늘 세금냈다. 영수증을 보여준다. 그런데 수위 아저씨가 너거

 엄마 알아보겠다. 이렇게 말했다. 왜 내가 은행에 가서 줄을 서니 수위 아저씨가

 자꾸 밖에 나가라고 해서 나갔다가 또 줄서고 몇 번째 되풀이 하다가 또 나가라고

하기에 울면서 울 엄마가 세금내고 오라고 해서 줄 섰다고하니 아저씨가 내어 주셨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한짓거리가 맞나 싶다. 그 만큼 아이는 어른스러웠다.

그런 아이가 그림책을 사줬더니 그림을 보고 글을 익힌 게 어느 날 어지간한 글자를

거의 읽었다. 어떤 것은 사투리를 그대로 발음해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보내니 공부를 못 할 턱이 없다. 아이가 학교 갈 무렵 이래저래 빚도

 다 갚고 안정을 찾았다. 그 때는 아이들 숫자가 하도 많아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 할 때다.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직원이 사립학교인 효성국민학교에 자녀 둘을

 보내고 있었다. 직원 중 여자 3명이 똑 같이 입학시킬 나이다. 원서 3장을 가지고와서

입학원서를 내란다. 유치원도 보내지 않았기에 사립학교는 나와는 가당치도 않았다.

 곁에 와서 설명을 해댄다. 오후 오전반 직장 나오면서 챙겨줄 준비가 되냐면서 아이들

놀다보면 학교 결석하기 부지기수다 하면서 여직원 2명은 같이 내자고 나를 졸랐다.

 나는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직장동네에 함께 사는 친구는 아이들 둘이가 똑 같은

 나이에 애들끼리도 동네 친구였다. 그 친구애가 유치원 가는 걸 큰애가 하도 부러워해서

일 년 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셋이가 내어서 하나가 떨어져도 가지 말자면서 졸랐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친구는 우리와는 비교도 안되게 잘 살았다. 점 보러가서 그 친구는

 신랑복도 자식복도 있어 잘 살 거고 나는 얼른 이혼하라고 해 자존심 상했다던 그 친구다.

같이 퇴근하면서 또 졸랐다. 일단은 아이 원서에 부칠 사진을 찍고는 용기가 나질 않았다.

부자 아이만 가는 학교 기죽이기 싫었다. 원서를 냈다. 3명 모두가 붙었다. 친구 둘은

기쁘다고 펄적 펄쩍 뛰었지만 나는 기쁘질 않았다. 그래도 포기 할 생각을 했다.

먼저 보낸 직원이 교직원 자녀는 수업료가 반이라고 하면서 보내라고 했다.

문의해보니 그렇다고 했다. 일단 입학금을 냈다. 통학버스가 있어 아침에 같이 나오면 됐다.

큰 아이가 학교에 가니 작은 아이가 문제다. 그래서 동생을 한 집에 살자고 졸라서 함께

살게 되었다. 학교에 보내니 거짓말 같이 공부를 잘 했다. 부자들만 모이는 학교에

유치원도 보내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아이가 나무랄데 없이 잘 한다고 했다. 숙제는

 퇴근하면 다해놓았다. 갓 입학한 아이지만 공부를 잘 한다니 나도 기가 났다.

빚이 없으니 날아갈 듯 기뻤다. 그래도 절약하는 내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시어머님께서 동네에서 아래채를 짓는 것을 보고 우리도 짓자고 말씀해서 그해는

아래채도 지었다. 전세를 주면 한 푼돈이 들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지었다.

지금생각하면 어머니는 나를 속으로는 참 장하다고 여겨셨다고 생각된다. 에미야

언제든지 돈은 너가 관리해라. 줘야 관리하지요. 불쑥 튀어나온 소리다. 어머니는 또 화가

나셨다. 너가 들어앉으면 애비가 먹여 살린다. 니가 돈벌려고 나가나 살림은 하기 싫고 직장에

 나가면 사내들과 히히덕거릴나고 나가지 허파를 뒤집어 놓는다. 이때다 싶었다. 그동안 일을

 대충 이야기했다. 학교 시키면서 돈 던 이야기 여자 때문에 빚 갚은 이야기 학교서 사고 쳐서

사표 낸 이야기 사표를 열 번도 넘게 냈다면서 하도 사표를 내어서 번거 혼자 다써버려라 싶어서

 간섭도 안한다면서 울면서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키워본 내 아들이다. 니가 고생하는 줄을

 내가 안다. 너도 자식을 키우니까 알겠지만 부모는 그래도 자식 편을 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너도 딸을 하나 더 낳아라. 너가 내 며느리지만 며느리는 딸같이 속에 말 다 못한다.

 니 마음에 응어리를 딸에게 풀어라. 힘들겠지만 내 말 들어라. 어머니의 진심을 시집온

후 처음 들었다. 8남매를 키우시려면 어머니의 어거지도 필요 하겠구나 이해도 갔다.

가슴이 후련했다. 어머니가 오시면 외박을 하지 않는데 어느 날 남편이 외박을 했다.

시어머니 가장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너는 잠이오나 밤새 주무시지 않는 어머니는 내가

예사롭게 잠든 것을 나무라셨다. 어머니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도 잦으니 나도

출근을 해야 되니 잠을 자야지 어찌합니까? 이러고 나면 또 빚지고 옵니다. 입 꾹 다물고 살아라.

 니가 큰소리 칠 때가 올 거다. 그래도 며느리에게 당했다 싶은 생각이 드셨는지 그 위로의 효과는

 불과 며칠이었다. 한마디 더 하겠다. 아이 둘을 하나는 업고 하나는 걸리면서 직장을 다닐 때 나는

대구에 와서 공부하는 시누이 딸을 함께 있자고 했다. 남편이 하는 짓을 보면 시어머니도 외손녀

말은 알아듣겠지 혼자 벌어 오남매를 공부시켜야하는 시누이는 얼싸 좋다고 반가워했다.

나는 힘껏 그 애를 보살펴주었다. 밥해서 받혀주고 잡비가 떨어져 외숙모하면 그렇게 어려우면서

 잡비도 대주었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여행비도 보태주었다. 질녀가 보는 외삼촌은 정말 실망

그 자체라고 말하였다. 나는 가끔 어려움을 그 질녀에게 쏟았다. 그 아이도 지금은 오십이다.

나를 가장 많이 챙겨주는 생질녀다. 그 어머니는 나를 보면 항상 “자네 고생 했네” 라고 하시고

그 질녀는 다섯 외숙모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외숙모라고 한다. 우리 아들 결혼 때 두둑하게

 부조한 질녀다. 그렇게 어려운 외숙모에게 내가 손을 벌린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외숙모

 대소사 때 큰일에 만나면 나의 팔짱을 끼고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약대를 나와 약사를 하고

신랑은 의대교수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야야 너거 직장에서 또 내 집 갖기를 하지 않느냐?

왜 그러십니까? 바로 위 동서가 집이 없는 게 시어머니로서 마음에 걸렸는지 너의 동서가

 집장만하거로 지금 하고 있는데요.” 그 동서도 어지간히 시어머님께 구박을 받았다. 집이

없다는 게 동서 살림을 잘 못살아서 그렇다고, 그래도 남편이 보듬어니 나보다는 덜했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친해 자주 연락하고 살고 있다. 나의 병문안 와서는 그렇게 우신 동서다.

그래서 나는 동서집을 장만하기 위하여 두 번째 내 집갖기 동참을 해 동서의 집을 해주기로 했다.

 그 당시 24평 아파트 총공사비 480만원 그런데 집이 다 되어가도 전혀 집값이 오르질 않는다.

 한번 상종가를 쳤던 부동산이 내리막길을 달렸다. 우리 집은 450들어 그때 1900만원까지 했다.

 땅값 집값이 올라서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자 한참동안은 부동산이 내리막길이라 돌아서서 팔려고

 하던 집이 팔리지를 안했다. 참고로 동서는 그때 춘천에 계셨기에 대구가 춘천보다 집값이 더

오를거고 그때 대구 집을 팔아 춘천에 사려는 투기목적으로 한집이 오나공되고 보니 본전에도

거들떠보지를 아니했다. 그래도 나를 나무라지 않고 대구집이 헐하면 춘천도 헐하겠지 할 수

 없잖아 그래도 팔아 달라고 했다. 온 동네 복덕방에 내어 놓으니 겨우 본전에 팔기로 했다.

집이 팔렸다는 연락을 하니 돌아서서 춘천에도 집 계약을 했다고 했다. 동서가 대구로 오셨다.

현금 480에 1900짜리를 계약했다고 하셨다. 장기저리융자를 많이 받고 우리처럼 세도 거의 놓고

사려고 한다고 하셨다. 내 경험이라 형님이 너무 힘드실건데 라고 하니 급하게 파는 집이라

그 값어치 보다 높기에 갚을 능력이 안되면 팔 요랑을 하고 사신다고 말씀 하셨다. 그래도

힘든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때도 나는 주위에서 권해 학습지 세일즈도 했다.

나는 장사를 하면 정말 박리다매 직장에서 동료들을 상대하다보니 바깥에 보다 더 싸게 했다.

세일도 내가 덕을 덜 보니 주문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돈복이 없진 안했다. 동서가 우리집에

 오실 때는 처음으로 저축을 시작 할 때다. 동서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형님 제가 백만원 해 드릴께요.

 동서는 거절한다. 말만 들어도 고마워 마음만 받을게 나는 해준다고 했다. 그럼 시어머님께 다른

 동서들에게 말 하지 말라고 했다. 안할게요. 형님 시동생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형님 그리 아세요

. 사실 남편한테 동서 돈 해준다면 돈이 엄청 있는 줄을 알까봐 나는 남편 한테도 말하지 않고

거금 백 만 원을 송금했다. 그 후에도 조카 대학등록금도 한번 해 주었다. 그 동서는 지금도

그 점을 아주 고마워 하고 있다. 함께 사는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은 날 보고 언니고

 아이들 옷 한 벌 변변한 게 없어면서 동서를 도운다고 동생이 나를 무척 나무랐다.

그래도 생전처음 남편한테 눌려서가 아닌  내의지로  형제분을 도울수 있다는 게 나는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