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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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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속일지라도 5


BY 그림이 2008-10-07

 

나는 가끔씩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본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동네 안에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이승만대통령 시절 꽤

규모가 큰 도자기 공장을 집안 할아버지가 경영하셨다. 학교

선생님들과 도자기공장은 규모를 넓히고 첨단기술을 도입해

타지에 기술자들을 불러오니 100여 호가 넘는 큰 동네

이지만 방이 귀해 방세가 꽤 나갔다. 어려운 형편에 부모모시고

자녀들 공부시키려니 항상 빠듯한 가정형편이었다.

우리보다 훨씬 부자 집 친구들도 진학을 하지 않았지만 신식

교육을 받으신 할아버지께서 논을 팔아서라도 나를 공부시키라는

말씀 지금도 잊어지질 않는다. 그러니 우리 집도 아래채를 세를

처음으로 놓았다. 아들 둘을 둔 젊은 선생님이 할아버지 방에

인사를 하면서 이웃면에 고향을 둔 아무게라고 소개하면서 교직원

들 중 이 동네 출신인 선생님께서 이댁으로 이사 오면 절대로

부부싸움을 하거나 큰소리를 내지마르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좋은 점 배워 가겠습니다. 소문이 날 만큼 가족이 단란했다.

엄마는 어른들 자애함을 어른들은 하나뿐인 며느리를 항상

보배라고 자랑하시고 부자 집 딸의 고생을 안쓰러워 하셨다.

천성이 곱고 착하신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정을 가신

후 그렇게 그리워 하셨다.

오촌이 객지로 이사를 가 배 다른 작은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고향에 가서 죽고 싶다고 하셔서 작은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 만큼 엄마는 집안에서 인정할 만큼 동네에서

인사를 듣고 사셨다. 엄마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집안 아재가

교육장으로 계시면서 직할시가 되자 남편을 바로 대구로 이끌어

주시기까지 하면서 “이서방 자네 장모는 효부로 소문났네. 이실이도

꼭 장모를 닮았네. 잘하고 있재 처가동네 가서 대강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장모가 그 만큼 모두에게 인사를 듣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좋아했다.

어느 날 시어머님이 오셨는데 남편이 “어무이 우리 장모도 참 고생한다

농사 지으셔서 다 가지고 오지 내가 좀 별나나 그래도 나를 위해 몸

약하다고 개소주도 해오시지 벼락이 떨어졌다. 너 거 장모가 뭐

불쌍하노 돈이 없나 늙기를 했나 아직 청춘인데 니 이미는 어떤

고생을 하고 살았는 줄 알기나 하나 어머님보다 16세 아래인 친정

엄마를 생각는 아들이 너무 미웠다.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아들이

친정에서 가지고 오는 표를 어머니 앞에 자랑삼아 하는 게 자존심이

몹시도 상하셨다. 이러시는 어머님의 성품을 너무 잘 아는 남편은

처가에서 가지고 오는 걸 잘 이야기 하지 않는 줄은 나는 안다.

지나간 이야기를 한 번 더 하자 남편이 졸업 후 취직이 안되었을

때 시댁에 갔다. 중매한 고종 시누이가 돈 있기 때문에 공부도

시켜 줄거다 라고 했기 때문에 3년 동안 연애한 아들을 기어이

떼 놓으신 어머님이 시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 온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일부러 내가 돈이 많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내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고단수이시다. 1971년 봄 나는 시어머님 앞에

돈 45만원을 내어 놓았다. 졸업 때까지 한 푼 보태지 않아도 먹고

쓰고 잡비까지 충분한 돈이다. 복학을 했다. 졸업 후 취직이 되지

않으니 화살이 내게로 돌아왔다. 취직 할 때까지 남편은 내게서

125만원 가지고 갔다. 빚 이지니 엄마가 삼남매 공부시킬 때 한마지기도

팔지 않은 논을 일곱 마지나 팔아 갚았다. 그런 내 앞에 니 가 꼴난

돈 45만원 보탰다고 유세떠나 동서 시숙이 있는데 고함을 지르면서

놀고 있는 아들을 내 탓으로 돌렸다. 너무 분해서 45만원요? 100만원

도 훨씬 더 들었습니다. 마당에 서 있는 남편은 입 다물고 있을 줄

알았던 내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자 마당에서 마루에 올라와 발길로

나를 찼다. 듣고 계시던 시숙이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줄을 알고

동생에게 나무라는 눈치를 주니 불똥이 시숙에게 터졌다. “니 가 논을

다 팔아 먹어서 동생이 공부를 못 마쳐서 저런 소리를 듣는다면서 너를

도끼로 대가리를 두 쪽을 팍 갈라놓고 싶은 심정이다.,, 라고 히사면서

우시니 나는 기겁을 했다. 친정에서 가시나 소리도 듣지 않고 자란나다.

그 날 오후에 아기를 업고 시댁을 나섰다. 두 번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에미야, 입 꽉 다물고 살아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따라

나오는 남편, 당신 ‘처가에 가서 맘 풀고 올래, 나 혼자 대구 갈께 나는

엄마가두렵고 무섭다. 살면서 그 공 할게, 남편이 비굴하고 천박했다.

다시는 너와는 살지 않을 거라고 맘먹은 게 올해로 만 39년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