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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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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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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속일지라도 2


BY 그림이 2008-09-28

1976년 8월 말인가 9월초 집이 거의 다 되었으니 이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사를 하란다. 마침 살던 집 전세 만기도 되고 해서 이사 준비를 해야했다.

아직 대문도 달지 않았지만 이사 온 집도 몇 집 없었다. 복직하러 처음 와서

아이 둘을 업고가 방을 얻으려니 세를 주지 않으려고 해서 할 수 없이 큰

놈은 친정에 맡기고 아이와 둘이서 살집이고 아이와 저는 밥만 먹고 직장에

간다니까 방 한 칸 사글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다 친정에서

 큰 아이를 데리고 오니 주인이 성화였다. 세 살짜리 큰놈이 울기라도 하면

입을 막고 살다가 지례 쫓겨나 엄마한테 30만원을 가지고와 전셋집으로

옮겨 살다 빗 덩어리 집을 내 집이라고 지었다.

 

아버님 제사라 큰집에 가니 벌써 집 짓는다면서 인사가 자자해 나는 하나도

기뻐질 않았다. 내 집이 될지 말지 거의가 빚 덩어리인 집 인사 받기가 거북했다.

 집 짓는 것과는 상관없는 남편은 그런 것은 관심 밖이었다. 학교를 옮기니 전

근무지에서 빌린 돈 독촉이다. 주머니에 이자인 듯 한 송금 영수증이 보였다.

얼마 전에 다 갚아 줬는데 또 5 천 원짜리 송금이니 또 10만원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그것도 고사하고 또 사고를 쳤다.

울릉도에 다닌 학교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는 대구 근교 시골 사립학교에 사흘

근무하다 재정이 빈곤한 학교 살림살이를 보고 다시 울릉도로 가려고 했다.

이미 사표를 낸 상황이다. 다행히 요즘처럼 팩스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전화로만 교육청에 알려왔고 서류는 배로 오기 때문에 우편은 도착하지 않는

상태였다. 때마침 친정 먼 고모 벌 아저씨가 교육청에 아는 분이 계셨어 직장을

팽개치고 아이를 업고 가서 울었다. 아저씨 제발 복직 좀 시켜주세요. 다시는

사표를 못 내게 할게요. 온 삼일을 쫓아다녀 남편을 보냈다.

교장한테 가서 무조건 빌어라는 말을 듣고 당부했지만 역시 맘이 놓이질 않았다.

후에 안일이지만 울 시모님께 자기 사표 낸 거는 속 빼고 여름 날 이사 갈 떡 쌀

담가놓고 사흘을 쫓아 다녔으니 쌀이 썩을 수 밖에 그걸 시모님께 일러 떡 하나도

옳게 해서 이사 갈 줄 모르는 너가 무슨 살림을 산다고 지금 생각하니 왜 나는

그렇게도 바보였나? 무섭기만 했던 시모님은 나를 야단만 치면 친정서 돈 가지고

오지 먹을 거 가지고 오지 정말 재미났던 모양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끄럽지만

공부하고 취직하기까지 죽도록 벌어도 돈을 못 갚아 친정 논을 일곱 마지기를 팔아

빚을 갚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친정엄마 한테는 집짓는다고 돈 달라 소리는

못하고 양식과 부식은 대어 줬지만 아이들과 내가 고생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60평대지에 건평 18평 방 셋의 아담한 양옥집 방 둘은 세놓고 처음 엔 애 보는 아이와

두 아이 넷이 살다가 추석 쇠러 간 아이가 오지 않아 그 뒤로는 옆 방에 부탁을 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다가 틈만 나면 친정엄마를 불러 놓고 직장에 다녔다.

 

 세 살 다섯 살 보다 못한 이웃 사람이 업어 주기도 했다. 요즈음 같이 놀이방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탁아소는 만 두 돌이 지나면 못 데리고 오게 했다.

어린것들이 하루해가 얼마나 지루했을까? 그런데 큰 아이가 작은 아이 오줌도

누이고 잘 데리고 다닌다며 이웃에 도움도 있었지만 지금도 아찔하다.

 

겨울철이 다가 왔다. 추우니까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다. 친정엄마가 촌에 가시고

계시지 않던 어느 날, 그 때만 해도 집 주위에는 밭도 있고 요즈음처럼 아스팔트길이

아니였다. 버스길 도로변도 빈터가 많았다. 퇴근 버스를 타고 집이 가까이오자 버스

밖에 내 아이가 놀고 있는지 밖을 내다보게 된다. 비가 온 질척한 길에 큰 아이는 앞에

가고 작은 아이는 뒤따라가다 질척한 길에 엎어진다. 큰 아이가 돌아보며 동생을 일어

킨다. 버스가 정류장에 선다.

 

나는 아이가 있는 쪽을 정신없이 달려갔다. 다섯 살짜리가 세 살짜리를 감당을 못한다.

큰 아이가 나를 보더니 동생을 잘못 봤다고 꾸짖을까봐 벌벌 떨고 있었다. 흙덩어리가

된 아이를 대강 닦고 큰 아이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동생 잘 봤다 맛있는 거 사 줄게,

멋 모르는 아이는 엄마가 꾸중도 않고 맛있는 거 사 준다는 말을 듣고 신이 났고

나는 흙탕이 된 작은 아이를 업고 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집이 뭐 길래 아이들을 이

고생을 시키나 시부모가 아이를 봐 주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를 못살게

하더라도 아이만 봐 준다면 하늘같이 모시려고 맘먹건만 나는 그런 복도 없었다.

너무 어려서 어려운 세상 경험을 산 내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