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으러 와라”
다른 날 같으면 집에서 먹겠다고 가지 않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쳐 놓고 아들아이랑 친정엄마네로 향했다.
엄마네 아파트 입구엔 접시꽃이 기다랗다 고개를 빼고 우리를 반긴다. 여름이면 접시꽃은 아파트 경비가 되어 이곳을 지키곤 했는데 엄마네가 이사를 하면 일부로 오게 되지 않을 게다.
일산 신도시가 처음 생길 때 엄마네는 우리보다 일 년 먼저 이곳으로 아파트 분양을 받아 이사를 오셨다. 그게 16년 전이다.
그때 엄마 나이53세였고, 남동생 둘은 결혼을 안 한 총각들이었다. 홀로 과부가 되어 나와 동생 둘을 가르치느라고 셋방을 전전하다가 처음으로 집을 장만한 이곳은 복도형 22평이라 좁았지만 이사하던 날 엄마와 나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주변 환경은 정리가 덜 된 상태라 공사 끝에 남은 자질구레한 자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벌판엔 미완성인 아파트들만 가랑이를 벌리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찻길은 스케치를 하고 색을 칠하다 만 것 같이 중간 중간에 길은 끊겨져 있었지만 우리는 가슴이 뭉클뭉클하다가는 눈동자 아래로 자꾸만 눈물이 삐질 삐질 삐져나왔다.
뜰엔 엄마가 늙어 거둥이 힘들어질 때가 되어야 숲이 우겨질 것 같은 손가락 굵기 만한 나무들이 정원수로 심어져 있고, 급하게 심은듯한 국화꽃이 좁다란 화단에 띄엄띄엄 뭉텅이로 나무와 조화를 못 이루고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여기가 뜰임을 표시내고 있었다.
16년이란 세월동안 나무는 다리통만해서 그늘을 넓게 확보하고, 뜰엔 꽃들이 계절마다 피어났다. 목련이 피고, 살구꽃이 지면 복사꽃이 볼그족족 화사할 때 여름이 오고 접시꽃이 뒤이어 피어나는 곳을 엄마는 음식을 만들어 이틀이 멀다하고 한두 번씩 우리 집을 오고 갔다.
하나였던 딸이 엄마네 아파트로 들어올 때는 아이 둘과 개 한 마리로 식구는 몇 배로 불어 있었다. 주변사람이 우리 식구를 모른 척 할 때 엄마만은 찢어진 울타리를 밧줄로 묶어 쓰러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붙잡아 주었다. 그렇게 엄마랑 같이 3년을 살다가 내 집을 장만해 엄마네 아파트 옆 동으로 라일락꽃이 향기를 난분분히 날릴 때 이사를 했다.
일산 신도시에서 9년, 친정에서 3년, 친정엄마네 옆에서 3년, 15년을 같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그랬는데……. 6월 마지막 날 엄마는 이사를 가신다.
갑자기 집을 내 놓고 집이 팔리고 그리고 분당에 집을 얻고 가게 되었다. 그쪽에 막냇동생이 살고 있어서 그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엄마네 집이 팔리던 그날 그리고 분당으로 이사 간다고 내게 말하던 그날,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멀리 이사를 간다는 걸 아는 날은 내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밀려들어 눈물이 솜눈 내리듯 펑펑펑 쏟아졌다.
며칠 동안 왜 이사를 가는지? 왜 그런 결단을 내게 한마디 의논 없이 했는지? 엄마와 동생들에게 묻지 않았다. 한동안은 왕래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내가 잘 살 때까지는 연락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혼자 산다고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혼자 사는 나의 외로움을 동생들은 모른다는 섭섭함이 밀려 문을 닫아걸고 겨울눈처럼 펑펑 울어야했다.
15년 동안 친정이 옆에 있었다는 그 든든함을 동생들도 나만큼은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두렵고 힘겨울 때 전화도 안 받고, 친정엄마가 자주 우리 집으로 들락거렸을 때는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고도 했지만 그건 투정이었고 엄마니까 받아 주려니 하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자식까지 낳은 남자도 떠나고, 영원히 날 사랑한다는 남자도 등을 돌리고 세상이 밑바닥으로 밀어내도 엄마는 살아 있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줄거니까, 그랬으니까, 그랬으니까...그런 엄마가 이사를 가신다.
하얀 접시꽃은 엄마를 생각나게 한다. 말없이 매년마다 피어나던 접시꽃은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서는 엄마네 집 입구에 서서 나를 반겼다.
저녁을 먹고, 과일을 먹고, 엄마랑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이사하는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네 접시꽃은 왜 하얀색만 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