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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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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모 이야기


BY 오월 2008-06-10

꿀꽃,칡꽃,창포꽃, 방문을 열면 그렇게 보랏빛 칡꽃이 한 다발 방으로 굴러들어올 듯

피어있고 끝간데 없이 보랏빛 꿀꽃이 새하얀 망초꽃이 핀 곳이었다.

늘 가슴 저미도록 그리운 고향.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이 이미 공감가는 문장으로 모두들 표현 했기에

더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늘 그리운 고향.

가난에 찌들어 배고픔에 벗어나고만 싶었던 그 고향이 언제부터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

들만을 간직한 그리운 곳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두 동생을 키우며 살았던 고아 였던 친정엄마.

형제들은 많았지만 이미 돌아가시고 유일한 아버지의 피붙이 였던 고모

꽤 근접한 거리에 살며 엄마는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낳았고 고모는 딸 다섯에

아들 셋을 낳았다.

 

험한 세상에 내동댕이 처진 신세였던 엄마가 자식 일곱을 데리고 야무지게

살았던 반면 유순하고 느리고 억척스럽지 못한 고모는 나이 많은 손위 시누가 아닌

언제나 엄마에게는 돌봐줘야할 철부지 아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배가고파 일어나질 못하고 널부러져 있는 모습에 근근덕신 팔아오던

보리쌀을 반쯤은 덜어내야 했고 산골에 살던 우리집근처로 늘 나무를 하러왔던

고모의 나무단 속에 고구마며 쌀이며 보리쌀이며 그렇게 엄마의 곤궁한 살림살이를

나눠야 했지만 늘 한두명은 우리집에 와 있던 사촌들도 언제나 가족처럼 그리 살았다.

그래도 그 친척이란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어린날에 그렇게 좋았고 궁색한

고모집에 낑겨 하루밤이라도 자고오는것이 큰 기쁨이였다.

 

아직은 어린 자식들을 끌고 엄마가 도회지로 이사를 감행했고 그 많은 자식들과 파란

만장한 세상을 살아내는 사이 고모는 끝까지 고향을 뜨지 못하고 고모부와 별 달라지

지 않는 삶을 사신반면 겨우 아이 티를 벗어난 아이들을 도회지에 내 보냈다.

그래도 고모의 유순한 성격 탓인지 큰 오빠가 장가를 갔는데 그 올케가 날개없는 천사라

수없이 속썪이는 가족들 게으르고 어리광쟁이 고모 그리고 돌아가신 고모부 까지 참

살뜰하게 보살폈다. 고모부께 기대어 늘 어리광쟁이로 살아가시든 고모 그런 고모부를

잃으시고 한 7년 고모부 챙기는 일 벗어나 좋다하시드니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셔서

결국 도회지에 살았던 큰오빠 내외가 시골로 내려가야했다.

 

수전증에 약간의 치매 걸음도 풀편하시고 급기야 밥도 소화를 못시켜 죽으로 매 끼니를

설상가상 오빠네 아들둘이 있는데 큰아들놈이 사고를 당해 정신착란증까지 오빠의

고통이 말이 아닌 가운데 가장 큰 걱정이 먹고사는 문제 갑자기 시골로 내려왔지만

오십이 넘은 나이에 백 만 원 벌기도 힘이 드는 지라 언니가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정신이 올바르지 않는 시어머님이 집에 계시니 그 불안한 마음은 가히 짐작이 갔다.

늘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참 지극정성이든 올케언니 오십이 다된 나이에 아들이

미쳐가는 상황에 오빠는 백만원 벌이도 못해오는 상황에 그 많은 식구의 맏며느리로

시어머님 모시고 공부를 해 영양사 자격증을 따고 학교영양사로 취직을 했다.

 

그 사이 고모 상태는 점점 나빠져 8남매 자식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매월 언니가

버는 돈을 가족들이 모아서 줄터이니 엄마를 돌봐달라 그런 결론을 내렸지만 올케 언니가

오빠가 벌이가 없는데 난 벌어야 하고 아들도 이제 치료받고 대학교에 복학해야 하면

아들둘이 대학생이 되는데 이 좋고 힘들게 얻은 직장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니 할 수 없이 고모를 요양소에 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을 때 친정엄마도

울고 나도울고 아직도 살아계신 고모의 계모 엄마이자 내 세번째 할머니도 울고

우린 모두 엉엉 울었다 세상을 겁내고 소 눈망울을 닮았던 고모 정신이 온통 나간것도

아니니 얼마나 두렵고 한 번도 집을 떠나본적 없는 양반이 얼마나 두려웠을꼬.

참 많이도 슬펐는데 가까운 곳이라지만 모시지 못하고 요양소로 어머니를 모시는

그 효자아들 그 효부 며느리의 마음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하고 한 1개월 후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하루종일 고모 먹을 것을

해 놓고 아파트에 고모를 가둬둔 오빠네 생활과는 달리 요양소에서는 치매를 위한

프로그램 먹는 것도 매 끼니 다른메뉴에 말할 수 있는 동료들 그리고 의료진 까지

오빠집에 있을 때 보다 많이 좋아지고 정신도 많이 맑아진 상태고 얼굴도 밝아지고

손 떨림도 거의 없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모앞으로 아무런 재산이 없기에 전액 무료인 곳이라 했고 언니도 남의시선 어찌보면

 

아직은 자식이 있는데도 부모님을 그런곳에 모신다는 것이 부모님을 버렸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잠시 부모님을 모시며 꼭 모신다는 말이 좋아 모시지 그냥 같이 있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몸도 불편하시고 씻는것도 싫으신 어머님 대소변도 잘 조절못하시는 분을 모시고 아무리

내 사무실이라해도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정말 몰랐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니 이런 일들이 남의일이 아니기에 어쩌면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귀 귀울여지고 눈 크게 떠짐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건가.

에고 모르겠다. 지금으론 어머님이 더 나빠지지 않으시길 바랄 뿐이다.

좋아지신들 얼마나 좋아지시겠는가.

고모가 아직도 아이같은 그 천진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실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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