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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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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난 가슴이 아프다.


BY 蓮堂 2008-03-22

아직도 난 가슴이 아프다.

두해를 거듭해서 부모님을 먼 곳으로 보내 드린 그 봄이 다시 돌아오려는 움직임을 각이 꺾인 바람의 결이 보여주고 있다. 겨우 내내 머물며 물러나기를 고집하며 날을 세웠던 삭풍도 자연의 섭리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하게 밀려나나 보다.

해가 바뀌면서부터 다가올 봄을 겁내고 있었던 나다. 기다림이란 더디기 마련이지만 밀어내어 거부하고 싶은 일일수록 속도가 붙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 뼘 밖에 안 되는 하루의 길이를 늘려놓을 재주라도 부리고 싶은 맘이 부쩍 더 드는 요즘이다.

부모님에겐 그 봄이 넘지 못할 턱이었고 마지노선이었다. 아마 봄꽃의 화려함과 달짝지근한 봄 냄새의 유혹을 견디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

가슴이 터지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엄마는 죽음으로 알려주셨다. 여태까지는 가슴 터지게 울어본 기억 없이 눈물만 찍어낸 헛 울음으로 얕은 슬픔의 언저리만 겉돌며 살았던 것 같다.

진정한 아픔과 슬픔의 깊이를 재기엔 살아온 길이 짧았던 걸까.

아버님을 여의었을 때도 내 가슴은 무르지 않았다. 아마도 숙명이라는 순리로 받아들이다 보니 그렇게 무장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은 아직도 우려낼 게 많은 것 같은 아까움 때문에 억울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자 가슴부터 따끔거려왔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엔 가슴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순의 연세를 호상이며 국상이라고 건네는 위로의 말이 나에겐 억지의 소리로 들렸다.

엄마의 유고를 접했던 새벽에 내가 본 것은 봄밤이 어렵사리 물러간 자리에 미적거리던 푸른빛이었다. 그 빛에 눈이 시려 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물이 난 걸까. 물러나는 어둠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새벽별이 차창에 걸려 따라오다가 그렁거리는 눈가에 잘려 떨어져 나갔다. 엄마는 이 새벽을 맞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내일은 몰라도 오늘 새벽만큼이라도 보시고 가실 것이지 남겨놓고 가는 이 푸른 새벽이 아깝지도 않으셨나.

엄마의 죽음을 너무 일찍 믿어야 하는 사실이 두려웠고 나하고 부대낀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리 쉽게 받아들인다는 건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죄스럽기도 했다.

엄마가 외가에서 며칠씩 머무는 날은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외가를 멀리 하신 아버님은 엄마의 친정나들이조차도 마뜩찮아 하셨다. 엄마의 빈자리로 집안은 훈기가 빠졌고 식구들의 움직임마저도 얼음이 버석거리는 소릴 내곤 했는데 엄마가 외가에서 돌아오시는 날은 아버지와 다투는 날이었다. 오라고 정해준 날을 어긴 엄마의 행보가 아버지에겐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었지만 대쪽 같은 아버님의 성정을 거슬릴 만큼 엄마의 뱃심도 만만찮으셨다. 말이 부부싸움이지 아버님의 일방적인 승리였고 엄마는 그저 두어마디 대들다가 입을 다무셨다. 두 분의 냉전이 길어질수록 제일 답답하고 겁이 난 사람은 나였다. 아버님과 다투신 엄마는 단식과 자리보전으로 시위를 하셨고 그에 따른 후유증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맏딸인 죄로 집안일은 죄다 내 차지였으니 엄마의 친정나들이는 나조차도 반기지 않았었다. 엄마는 아버님이 안 보시는 곳에서 곧잘 쇼를 벌이셨다. 단식도중에 몰래 부엌에서 밥을 드시는가 하면 억지 신음을 뱉어 낸 엄마에게 속아서 부랴부랴 약국까지 달려가시는 아버님의 등 뒤에다가 종 주먹을 들이대며 입을 비죽거리시곤 했다. 그리곤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나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쇼맨십이 강한 그런 엄마가 또 다른 쇼를 벌이고 있다고 나에게 주술을 걸었다. 눈에선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지만 머릿속은 엄마가 벌일 쇼를 그리고 있었다.

하얀 시트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엄마를 덮고 있었지만 죽은 척 쇼를 벌이다가 ‘나 여기 있다’라고, 영구의 흉내를 내며 시트를 들추고 금방이라도 일어서실 것 같아서 시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트는 젖혀지지 않았고 더 이상 엄마의 쇼는 볼 수 없었다.

항상 유머와 재치가 넘친 엄마 특유의 표정과 말투로 봐서는 백 살은 너끈히 사실 거라고, 믿는 구석 없이 그렇게 난 나에게 안심을 시켰었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아직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갑고 눈물이 난다. 긴 겨울의 짧은 햇살이 방 가운데로 밀려들어와 풀기 빠진 어깨까지 기어오를 때까지도 미동을 않던 엄마의 등 굽은 모습이 나를 아프게 누르고 있다. 팔십 평생 한을 안고 삭이며 살아온 세월에 반기 드실 용기라도 가지셨다면 엄마의 삶이 그렇게 가랑잎 소리는 내지 않으셨을 텐데 엄마는 번거롭고 시끄러운 것은 질색을 하셨다. 더군다나 그 발화점이 엄마가 되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웬만하면 속에다 구겨 넣고 겉에다가 미장을 하셔서 자식들마저도 그 속을 알지 못했다. 그런 엄마에게 난 딸로서 마땅히 헤아려야 할 엄마의 고뇌를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 짐짓 외면하고 방관해야했다. 살뜰히 편들고 맞장구쳐서 뚫어주고 틔어주기를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 쯤 나에게 잠시 계신 그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지만 잡지 못했다. 남아있는 시간이 많아 두고두고 잡을 줄로만 알았던 내 아둔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발기발기 쥐어뜯어서 형체 없이 흩어버리고 싶어진다.

난,

아직도 엄마가 보고 싶다..........아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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