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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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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써보는 나의 유서-믿음직한 딸 혜빈이에게


BY 둘리나라 2008-03-20

<미리 써보는 나의 유서>

            

           제목: 믿음직한 딸 혜빈이 에게

 

 혜빈아!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엄마는 아마도 너와 함께 살고 있던 아름답고 재미있고 행복했던 세상과 작별인사를 한 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거야. 편지를 받고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너를 생각하니 가슴 끝에서 눈물이 타고 올라 목이 아파오고 눈이 시려오지만, 우리 울지 않기로 약속하자.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건 죽음이란 단어와 항상 친구가 되어 살아간다는 말이라고 엄마는 생각해. 누가 먼저 그 친구와 동행이 되고 나중에 동행이 되느냐의 차이이지, 결국에는 모두가 죽음과 어깨동무를 해야 하는 것이거든. 조금 일찍 엄마는 그 친구와 가는 것 뿐이야.

 혜빈아,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는데 막상 적으려고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어 버려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고 걱정이 앞서는구나. 초등학교 2학년인 너와 5살 난 동생 원빈이. 아빠도 안 계신 집에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되어 버린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엄마를 원망이나 하지 않을는지, 어떻게 살아 나갈 런지……. 모든 것이 걱정 이구나.

 혜빈아, 네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이 생각이 난다. 작은 손을 꼭 쥐고 응애응애 울면 눈가에 예쁜 이슬방울들이 맺혔었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 알갱이들이 아기인 너를 감싸 안고 있을 때는 하늘에서 내려 준  천사처럼 빛이 났었어. 날개를 숨겨둔 천사처럼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단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혜빈이를 보고 있으면 이겨낼 수 있었고, ‘사랑해요’하며 달려와 뽀뽀를 해 주면 가슴속에 새로운 용기가 자리를 잡았단다.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각오가 생겼어. 너는 엄마에게는 살아가는 힘이었어.

 혜빈아,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 내 딸. 동화책을 읽고도 슬프다며 울고, 야단을 맞으면 죄송하다고 울고, 동생이 말을 안 듣는다며 속상해 울고, 길에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자며 우는 너에게 부탁을 할게. 이제부터는 강하게 살아야 해! 마음을 굳게 먹고, 눈을 크게 뜨고, 세상과 부딪쳐 이겨 내야 해. 전에는 엄마가 그림자가 되어 지켜 주었지만 오늘부터는 너 스스로가 네 그림자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단다.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발밑을 내려다보렴. 움직일 때마다 따라오는 그림자가 보일 거야. 밝은 생각을 가지고 착하게 살면 함께하는 그림자도 너를 도와주며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해.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아야겠지? 눈물 흘리지 말고 울고 싶을 때는 가슴속으로 울기로 엄마랑 약속! 동생을 지켜나가는 언니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되는 거야 . 알았지?

 혜빈아, 아빠와 엄마가 서로 생각이 맞지 않아서 헤어지던 날, 혜빈이가 엄마에게 말했지.

 “엄마! 아빠는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버렸으니 엄마도 나와 동생을 사랑해 주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요. 엄마가 그런 사람을 만날 때 까지 제가 지켜 드릴게요. 힘내세요!” 그 말이 지금까지 살아가는 힘이 되고,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어 나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는 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

 어리지만 누구보다도 엄마를 이해하고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믿음직한 딸인 너. 너로 인해 살아온 시간이 행복했고 소중했단다.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는 하느님께 네 딸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고 싶어. 혜빈이가 나에게 해준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만큼만 꼭해주고 싶거든.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어 버려 너무 아이다운 맛이 없다고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데 엄마는 걱정 안 해. 고사리 손으로 설거지도 하고, 엄마의 아픈 다리도 주물러 주고, 방 청소도 했던 것이 생각해 보면 혼자서 살아도 될 만큼의 준비가 된 거잖아. 갑자기 내가 없어져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바탕이 있기에 조금은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내 딸은 처음엔 힘들어도 훌륭하게 이겨내리라 믿어. 언제나 그랬으니 말이야.

 혜빈아, 엄마가 항상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거 생각나니?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라고 했던 말 말이야.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말은 꼭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 전에 일기 쓰는 거 잊지 말고. 지켜줄 수 있지? 엄마, 그러리라 믿고 편하게 갈게.

 매일매일 내 생각 하지 말고 가끔씩만 해. 보고 싶다고 울면 하늘에서 보고 갈 수 없는 엄마는 더 슬프고 괴로우니까 우리 서로 그러지 않기다. 새끼손가락 걸기. 10년 후, 20년 후 내 딸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멋진 중학생, 상큼한 여고생, 예쁜 숙녀가 되어 있겠지. 입학식에도, 졸업식에도, 운동회에도 엄마의 자리는 비어있겠지만 네 가슴속 엄마의 자리에는 언제나 있을 거야. 곁에서 지켜봐 줄 수는 없지만, 네가 손을 가슴에 대면 느낄 수 있을 거야.

 바람이 불어서 네 뺨을 어루만지면, 비가 내려서 촉촉이 머리가 젖으면, 햇살이 따스해서 가슴이 포근해지면, 하늘이 너무 파래서 눈이 부시면 엄마가 온 거야. 동생과 사는 게 어려워 눈물이 나 쳐다본 밤하늘에 별이 빛나면, 너무 외롭고 쓸쓸해 찾아간 바닷가에서 하얀 파도가 밀려와 네 발을 적시면, 막연한 그리움에 올라탄 기차에서 멀어져가는 나무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면, 길거리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면 엄마가 있는 거야. 눈에만 안 보일 뿐 네 주변에서 함께 호흡하고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혜빈아, 세상에 어떤 인연으로 엄마와 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는 동안 너로 인해 사랑을 배웠고 삶이 의미로 가득했단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우리 지금까지 밀렸던 이야기 나누며 서로에게 깊은 사랑이 되자. 너무너무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할게. 어느 책에서 본건데 사랑하는 자식을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건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더라. 나도 세상에 혜빈이를 남겨 두고 가니 죽는 게 아니야. 이해할 수 있지?

 한 가지 염려스러운 건 아직 어린 너에게 많은 짐을 지워놓고 동생까지 맡겨둔 거란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기차를 탄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넌 해낼 것 이라는 말 뿐이구나. 미안하다, 정말. 엄마를 용서해주렴.

 안녕. 건강하고, 용기 있고, 희망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 세상의 좋은 일에 네 몫을 훌륭히 해나가는 딸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 힘이 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엄마를 불러. 알았지? 그러면 엄마가 찾아올게. 짙은 그리움으로 말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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