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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잔 놓인 풍경(1)


BY 개망초꽃 2008-01-31

나는 요즘 공지영의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을 읽고 있다. 누구나 하나씩 갖고 가는 상처, 그 상처로 좌절하지도 말며 슬퍼하지도 말고 한탄하지도 말 것.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분주한 곳이다. 물건을 만져보다가 흥정하기도 하고

일회용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아가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을 찾기도 한다. 이곳은 분

주하기도 하고 늘어터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풍경을 갖고 있다. 커피

잔이 놓여 있는 이곳은 내가 새로 찾은 일터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사람구경을 하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상업고등학교에

붙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없었겠지, 삼성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결

혼을 하지 않았다면 일산으로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혼자가 되어 엄마네로 이사를 오지 않았

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봄나물처럼 연두색 빛이었던 고등학교 시절과 등 푸른 젊은 날과 혼자 보낸 삼십대의 새벽

녘과 두 어깨가 무거웠던 사십 중반을 넘어서며 상처는 생겨나고 몇 가닥의 흉터로 이골이

난 지금의 나는 이곳에서 일을 한지 두 달이 넘어간다.


친정엄마네 옆집엔 딸아이와 함께 혼자 사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정사각형의 얼굴을 갖

고 있어서 그런지 이불집 코너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불을 폈다가 정사각형으로 반듯하

게 이불을 접으며 딸아이를 대학까지 졸업시킨 여자다. 그 여자는 내가 판판하게 놀 형편이

아닌데  판판하게 놀고 있다는 걸 친정엄마에게 듣고 커피 잔이 놓여 있는 이곳에 취직을 시

줬다.


내가 있는 코너는 커피 잔이 주 품목인 수입명품 도자기이다. 반짝이는 돌가루가 들어가지

않고 그렇다고 동물 뼈가 들어있지도 않고 순전히 흙으로만 빚은 커피 잔인데 왜 비싸야 하

는지 모르겠다고 손님은 고개를 갸웃갸웃 거린다. 도대체 왜 비싸냐고 내게 따져 묻고 뒤돌

아 가는 손님 뒤통수에 대로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를 하는 인사말이 도대체

이치에 맞는 건지 나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달을 보냈다.

커피 잔 한 잔값이 사만원이다. 코렐처럼 일 년 안에 깨지면 새로운 것으로 바꿔주는 제도도

없는 내가 팔고 있는 커피 잔은 설거지 하다가도 부딪치면 깨지는 도자기일 뿐이다. 플라스

틱도 아니고 스텐도 아니고 이불처럼 천으로 만든 안 깨지는 물건이 아니다. 유리처럼 조각

이 나 버리면 흙바닥에 쏟아진 물처럼 다시 담을 수 없는 그릇, 내가 팔고 있는 것은 유럽

의 야생화 꽃이 그려진 꽃무늬 커피 잔이다.


야생화꽃...... 내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내가 걸어가야 할 내 길. 상처 없이는 피지 않는

야생화처럼 내가 가야할  길, 항상 몽상처럼 떠오르는 기다림의 그 길, 그 기다림 끝엔

야생화가 길마다 둔덕마다 그득할 것 같은 그런 꿈 말이다.


이곳은 야생화 핀 언덕은 없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마다 대리석 타일이 반듯하다. 천장의

조명은 햇빛처럼 환하고 화려하다. 일하는 직원은 탈 수 없고 손님만 타는 승강기는 맨질거

리는 자주색 대리석이다. 손님이 볼일을 보러가는 화장실은 직원들이 가는 화장실하고 분리

가 되어 있다. 손님전용 화장실은 안방처럼 따뜻하고 야생화가 피어있지 않지만 사시사철

꽃향기가 번져 나온다. 직원용 승강기는 오래된 아파트 승강기처럼 회색빛이다. 직원용 화

장실은 바깥 날씨처럼 겨울 바람이 분다. 겨울이라 화장실엔 야생화가 피질 않는다. 내가

11시간 서 있는 코너만이 야생화 꽃이 넘실거린다. 커피 잔마다 접시마다 도자기마다 야생

화는 시들지 않고 조명처럼 화사하고 화려하고 은은하게 피어있다. 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반까지 야생화 꽃과 함께 산다. 이곳에 핀 야생화는 향기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라

면 특징이다.


향기 없는 야생화 둔덕에 서서 지루하고 심심할 때마다 유행가를 부른다. “사랑했던 기억들

이 갈 길을 막아서지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미련 없이 가야지~~” 그대가 떠난다

면 유행가 가사처럼 보내줄 수 있을까?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냐며 글을 쓸 수 있을까?


손님이 커피 잔에 눈을 맞추며 들어오신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손님은 묻는다.

커피잔 얼마예요? 사만원입니다. 손님은 다시 묻는다. 깨지지 않는 거예요? 아닙니다, 깨지

는겁니다. 근데 왜 비싼 거지요? 수입명품입니다. AS는 되나요? 죄송합니다만 안 됩니다.

근데 왜 비싼 거지요? ‘깨어진 사랑도 AS가 안되잖아요. 행복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

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구겨진 인상으로 손님은 나가신다. 뒷꼭지에 대고 인사를 한다.

즐거운 쇼핑되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오늘도 커피 잔이 놓인 풍경에 서서 향기를 맡는다. 도대체 향기 없는 커피 잔이 왜

비싼지 나에게 묻지 말아라.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는지 내게 묻지도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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