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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아이함께 시범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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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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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달러의 기적


BY 그대향기 2007-12-17

 

 

노루 꼬리보다 더 쪼금 남은 이 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자마자 아이들의  졸업이 둘씩이나

기다리고 있어서 은근히 고민이다.

둘째의 고등학교 막내의 중학교 졸업.

원래는 두살 터울이라 이렇게 벅차지는 않았는데 둘째가 생일이 빨라서 한 해 먼저 입학하는

일이 생겨서 3년의 터울이 되어 버렸다.

휴대폰은 다들 있고 MP3도 자가네들 용돈 모아서 다들 산 눈치고 옷은 인터넷에서

싸고 이쁜 걸로 비교 분석 해 가며 골라 사 입고 있어서 엄마가 간섭 할 일이 이미 지났고

(그것도 모르고 완전 범생이 티가 확연한 준메이커 옷을 엄마는 큰 맘 먹고 사 줬더니

예의 상 딱 한번 입어주더니 안 입겠단다. 너무 색감이 저랑 안 맞는다나 어쨌다나?

아니 그러면 안 입었더라면 다른 걸로 바꾸기나 했지 입긴 왜 입어서 바꾸지도 못하고

내 참 억울해서...)

뭘로 하지?

그러면서 큰애의  중학교 졸업선물이 생각난다.

 

우리가 이 곳으로 이사 올 때 큰애가 초등학교 2 학년 초.

13 학급이 있던 대규모 초등학교에서 전학년이 달랑 한 학급 뿐인 미니 학교로 전학하고

큰애는 6개월을 울면서 다녔었다.

매일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고 달래서 차에 태워 보내고 나면 하교 해서 내일은 진짜로

학교에 안 가겠다고 울고...

시골에는 학교 전체가 거의 대부분 친인척이 많은 같은 성받이 가족적인 학교가 많고

큰애의 학교는 이모 고모 큰집 작은집 그러다보니 사촌들의 집안이 모인 잔치마당?

그 속에서 큰애는 \"왕따\"를 당하며 도시에서 전학왔다고 놀림 당하고 어쩌다 친구를

사귀면 그 중에서 대장격인 여자 아이의 압력을 받은 다른 아이들이 더 이상 우리 애랑 못

놀게 하면 또 서러워서 울고 오는 날이면 다시 도시로 이사 가자면서 6개월을 울었다.

6개월이 지났다고 사정이 완전 평정 된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적응을 하려고 많이 노력

했고 나도 수시로 아이의 친구들을 만나면 정답게 인사도 하고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 주며

우리 애랑 잘 놀아주기를 당부하는 아부작전도 했었다.

 

그런 경우를 당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지만

날마다 학교가 가기 싫어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 보내야만 하는 어쩌지도 못 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시 이사를 가야 하나? 아이를 적응시켜야 하나?

어떤 날은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다가 울다가 잠이 들었는지 볼에 마른 눈물 자욱이

보여 안타깝기도 했었다.

남편의 사업이 수입개방화로 인해 빚까지 안으며 그만 두고 시작한 직장생활이라 다달이

어려웠던 가운데 내가 뭐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이 곳으로 이사를 한 것이라 아이들 한테는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던건 사실이다.

비포장 도로에 가로등이 없는 깜깜한 시골의 밤은 도시의 불야성에서 살던 아이들에겐

너무 무섭고 두려운 경험인데 그기다 학교까지 힘이 드는 생활이다 보니 많이 갈등했었다.

숱한 날들을 아이에게 미안했고 아이는 아이대로 상처가 되는 힘든 기간이 지나고

5학년으로 올라가서 어느 날 큰애는 어린이 부회장에 나가보고 싶다고.

그 동안 아이들과 많이 친해졌고 성적도 바닥은 아닌지라 용기를 내서 나가보라고 해 놓고도

걱정은 되었다.

텃세가 얼마나 쎄고 오래 가는 것인지 아이나 우리 부부가 겪은 일이라 또 상처가 되면

여린 마음에 얼마나 더 울 일이 생길건데 어쩌나.

그래도 아이의 용기가 가상하여 그냥 해 보라고 해 놓고 선거가 있던 날 아이의 하교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 졌다.

하루에 왕복 두 차례의 버스가 오고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큰애의 모습이 안타깝게

커져 오고 있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의외로 담담한 모습으로 씨 ㅡ익 웃으면서 큰애는

\"엄마, 나 떨어졌어요. 그래도 있잖아요 나를 찍어 준 애들이 몇 명 있었어요.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떨어졌어도 저를 찍어 준 애들이 몇 명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는 큰애가 이뻐서 꼬옥 안아

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그러고 나서 6학년 때 또 어린이 회장에 나가고 싶다고 했다.

5학년 때의 상처도 아픈 경험인데 또 도전을 하겠단다.

그것도 전교 어린이 회장에.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 학교에서 어떻게.....

마음 맞는 친구 몇명이랑 광고 전단지도 삐뚤빼뚤 만들고 무엇을 위해 일하겠다는 공약도

나름 만들어서 며칠을 들떠서 다니더니 드디어 결전의 그 날!

아침에 등교하는 큰애의 머리를 빗겨주며

\"열심히 최선을 다 하고~~~

(여기에서 목이 메인 나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 주면서)

혹시 상대편이 이기더러도 축하 해 주는 멋진 딸이 되었으면 착한 딸이겠다\"

타일러서 보내 놓고도 하루종일 마음밭은 아이에게 가 있었다.

첫 아이의 어린이 회장 출마라.

아무리 작은 규모의 단체라도 \"장\"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 일이라 조금은 긴장이

되었고 전학초기에 아이가 겪은 쓰라린 경험이 깔린 일이라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의 해가 거의 다 지나갈 무렵 마을 버스가 먼지를 남기며 우리집 앞을 휭~하니 지나가고

아침에 예쁘게 원피스를 차려 입고 학교에 갔던 큰애와 둘째가 조잘조잘 참새떼처럼

떠들면서 논둑길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인다.

아~~~

이번에는 느낌이 좋은데?

넓은 마당을 힘차게 뛰어오는 두 아이의 모습이 기쁨으로 넘친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섰는 엄마 품에 뛰어드는 두 아이를 넘어질 듯 안아주며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을 충분히 축하 해 주었다.

\"엄마,엄마. 내가 완전히 아이들 표 다 먹었어요.같이 나온 친구는 떨어져서 울길래 제가

달래줬는데 저도 같이 울었어요.기분이 좋긴 했는데 표나게 좋아하진 않았어요.

저 잘 했죠?\"

이제야 충분히 좋아하는 기분을 내는 아이가 대견했다.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한 아이가 기특하고 어린이 회장이 되어 돌아 온 아이가 자랑스러웠다

 

1년동안 나름의 성실성으로 학교를 위해 일하고 아이들과 친해진 아이는 그 아이들 모두와

같이 졸업하고 또 같이 중학교를 진학했다.

중학교에 가서는 우는 일은 없어졌고 중학 3 학년 때 학생회장 선거에서도 또 이기고 돌아

오는 기쁨을 선물했다.

큰애는 공부를\' 아주 잘함\'이  아니고 중 상위 쯤?

그런데도 아이들은 우리애를 자기네 또래의 \"장\"으로 세워주는 영광을 두 번씩이나 주었다.

숫기가 적은 대신 성실하고 외모가 뛰어나게 이쁨보다는 수더분한 큰애를 아이들은 친근

하게 받아 들인 모양이다.

남녀공학이고 시골아이들이라 순진해서 자주 우리집에 우루루 몰려오면 라면이나 밥을

있는 반찬에 차려 줘도 꿀 맛으로 먹으며 넓은 마당에서 자기네들 끼리 축구나 족구를 하다

돌아가는 애들에게 시원한 음료수도 내 주곤 했었다.

바쁘지 않으면 그 애들이랑 같이 족구도 하고....

 

그러면서 일년이 지나고 중학교를 졸업 할 무렵.

몇달 전 부터 아이의 졸업식 때 무엇을 해 주면 오래 가슴에 남는 선물이 될까 고민이

되었다.

쉽게 하는 앨범이나 학용품은 흔해서 싫고 용돈을 주려니 액수가 부담스럽고....

그러다가 나는 조금씩 모아둔 비상금을 농협외환 창구에서 10달러 씩 30 달러를 바꿨다.

그 때 1 달러에 한화 1000 원이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들이 30 명이니 10 달러씩 봉투에 넣고 애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서 교장선생님께

갖다드리며 졸업식 때 아이들에게 하나씩 전달 해 주십사고 했더니 교장선생님은

한사코 나더러 전달하라신다.

교사생활 수십년에 이런 특별한 선물은 처음이라 본인이 직접 전달하고 의미를 얘기하라고.

그 날 교장실에서

\"이 10 달러는 앨범 하나 정도 살 수 있는 적은 금액이지만 그냥 앨범으로

선물하면 낡으면 버릴거고 용돈으로 주게 되면 오락실에서 잠깐 즐기다 보면 없어질 금액

이지만 달러는 일단 은행에 가서 교환해야 쓸 수 있는 돈이고, 그러다 보면 쉽게 안 쓰게

되고 책갈피 어딘가에 넣어 뒀다가, 나중에 사업을 하든 해외 여행을 가든 최소한의 비상금

내지는 종잣돈이 되어 아이들이 꿈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얘기 했던 것 같다.

내가 은행 업무도 보지 않는 사람인데 어느 날 농협외환 창구에서 달러를 바꾸는데

남편은 희안하게 뭣에 쓸 건지 묻지도 않았고 나도 굳이 미리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졸업식에서 아이들에게 교장실에서 했던 얘기를 거의 똑 같이 했었다.

10 달러의 비상금으로 꿈을 가진다면 더 큰 꿈도 이루리라고.

그냥 10달러의 돈의 가치를 갖지말고 10 달러의 미래를 꿈꾸라고.

 

아이들은 전혀 생소한 선물에 어리둥절도 하고 재미있어 하는 녀석에 봉투에서 벌써

빳빳한 10달러를 빼 들고 이리저리 구경하는 녀석에 옆 친구도 같이 10달런가 확인하는

녀석까지....

어쩌면 처음으로 달러를 구경하고 제 돈으로 선물받았을 아이들의 신기해 하는 모습에서

나는 의도했던 기쁨보다 더 많은 기쁨을 맛 보았다.

큰애도 모르고 있다가 그 날 처음 알고는 졸업식이 끝나고

\"아~이, 엄마는 깜짝쟁이.고마와요.엄마. 그리고 잘 간직할께요.\"

친구엄마들도 감동적인 선물이라고 고마와 하셨다.

남편은 그저 빙그레 웃다가 참 좋은 선물을 했다고 칭찬했다.

어떻게 그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다 나왔냐고.....

 

모르겠다.

세월이 6년이나 흘렀는데 그 때 그 졸업생들이 그 10 달러를 어디다 뒀는지 아니면

벌~~써 바꿔서 오락기에 먹혔는지....

지금보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나고 그 애들이 어른이 되고 또 가정을 꾸리고 자기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졸업할 때 쯤 내가 준 10 달러를 한번 쯤 생각해 준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선물이겠고 더 잘 되어서 정말 나의 작은 꿈들이 아이들의 기적이 되어 이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어준다면 10 달러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아주 작은 믿음 하나만 있어도 태산을 옮긴다고 했는데 10 달러는 적지만 아이들의 꿈이

그기서 부터 커 간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때 부터 여학교와 남학교로 뿔뿔이 흩어져서 진학한 아이들이 가끔 보고싶다.

지금쯤은 군대에 가고 어엿한 숙녀가 다 되었을 큰 애의 코흘리개 친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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