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022

시어머니는 새어머니


BY 그대향기 2007-10-19

내 시어머니는 남편의 생모가 아니고 새어머니시다.

남편이 중3때 생모가 돌아가시고 지금의 새어머니가 들어 오셨다.

6남매를 남기고 생모가 돌아가신 집안은 하루 아침에 질서가 깨어지고 난리아닌 난리통.

아침마다 양말짝 챙기는 일도 전쟁이고 끼니 때 마다 식사수발도 하루이틀 사촌 누님네와

큰어머님이 도와 주시다가 삼오를 끝으로 모두 돌아가버린 집에는 홀아비와 올망졸망한

6남매만 눈들이 뀅하니 들어간 모습으로 오롯이 남았단다.

라면으로 몇 끼니를 해결하고 시장에서 해서 파는 반찬으로 또 며칠을 버티던 시아버지는

동네분의 소개로 지금의 어머니를 선 보게 되고 보름만에 합쳐서 살림을 도맡아 하시게 되었단다.

어린 것들이 엄마의 손길이 그리운 채로 골목길에서 고개를 빼고 낯선 엄마의 얼굴을 삐꿈 내다보는 모습이 안스러워서 생각이고 뭣이고 없이 그 길로 짐을 챙기고 어린 남매들을

거두시며 새어머니의 자리에 앉게 되셨단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조르록 6남매를 입히고 먹이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건데 시어머니는 힘든줄도 모르고 하다보니 10년,20년 ,30년.

올해로 꼭 30년 째 새어머니의 자리를 지키신다.

아버님의 성격이 워낙에 고집불통이고 미식가의 입맛은 감히 아무도 쉽게 맞추지도 못하는

별난 입맛이라 한 밤중에도 본인이 잡숫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대령해야 하는 까다롭고

별난 성격인데 새어머니는 지금도 잔소리가 듣기 싫고 짜증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다 바치신다.

자라면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어쩌다 시댁에서 그런 광경을 보면 별나라의

사람들인가 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저녁 밥 숟가락을 씻고 난 다음에는 가능하면 군음식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밤 10시 이후의

진하고 기름기 철철나는 야식을 먹는 모습이 왜 그리도 낯설던지...

어쨌든 새어머니는 그런 아버님의 괘팍한 식성도 맞추고 한창 먹성좋은 6남매의 허기진

배도 채우시면서 열심으로 살아오셨다.

한번 이혼의 경험이 있으신 어머니는 자식을 생산치 못해서 이혼을 당한걸로 알고 있다.

본인이 이렇고저렇고 말씀은 없으시지만 큰댁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다.

복잡한 가족관계가 아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미묘한 갈등도 없어서 더 다행이었다.

큰댁 어머니는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이를 둘 데리고 재혼을 하셨는데 또 아들을

하나 더 생산하시니까 두 엄마에 세 부류의 자식들이 무슨 일만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신경전, 보이는 물리적인 대립을 하는데 무척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쯤에 수혈이 필요해서 가족의 헌혈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새큰어머니는 재혼해서 낳은 아들은 헌혈대에 못 올라가게 온 몸으로 사수하고

전처의 소생들에게는 빨리 헌혈하라고 성화셨다.

어쩌지 못하는 모정이겠거니 해도 전처 소생들은 그 일로 많이 서운해 했었다.

다행히 우리 새어머니는 그런 일은 최소한 없으니 다행인지 어머니께는 섭섭한 일인지...

새어머니는 음식솜씨도 좋고 뭘 하시는 걸 좋아하셔서 조물조물 잘 만드신다.

그래도 피로 맺어진 모자지간,모녀지간이 아닌 이상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자잘한 감정의 앙금들이 식구 모두에게는 상처처럼 남아 있어도 누구하나 딱 부러지게

왜 이래요? 왜 그렇게 밖에는 못 하는 겁니까? 하고 대드는 사람이 없다.

우리 아이들도 20년이 다 되도록 모르고 친할머니로만 알다가 최근 2~3년 전에 동서들이

아이들이 알고 있는 줄 알고 이런소리 저런소리 하는데서 얻어듣고 와서 내게 묻길래

사실대로 말 했더니 아이들은 어쩐지 외할머니가 자기네들을 보듬고 살갑게 대해주시는거랑

새할머니가 보살피는거랑 차이가 난다는것을 어릴 때 부터 피부로 느끼고 있었단다.

아무도 미리 말 해 주지 않았는대도 아이들은 그냥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네.

내가 시집 갈 때부터 지금의 새시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갈등이 없는데

 

 

무슨 사건이 집안에서 생기면 친부모가 아닌 것이 확연히 차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15년 전에 남편이 암으로 수술을 받던 날 다시는 아들의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는데 시어머니는 다니던 직장에 출근을 해야한다고 병원에는 나 혼자서 6시간의 무섭고도 서러운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고 야속하던지 그 날 하루 회사에 안가면 굶어 죽을 만큼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건만 아들의 손 한번 잡아주지도 않고

무심한 전화선 너머로 수고해라.....뭘 수고 할까? 죽음과의 싸움에서 살아나오는 수고를 할까? 6시간을 물도 한모금 못 마시고 화장실에도 못 가고 혹시나 예정된 시간이 되기전에 보호자의 이름을 미리 부르면 가망이 없는 결과라던데 오줌보가 터지는 수고를 하라는 건지...

수술실이 여러개 연결된 복도에서 중간 중간에 다른 보호자를 부르기 위해 수술실 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몸이 벌떡 일어나지고 간호사의 입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실감을 못하는 어마어마한 피말림의 순간들이다.

그 6시간이 악몽같이 지나고 대충 피를 닦은 모습으로 수술실 침대에 퉁퉁 부은 모습의 남편이 보이고 보호자인 나를 찾는 간호사의 목소리는 천사의 목소리로만 들렸다.

그 때 남편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키스를 하는 용감한 남자였다.

피가 여기저기 묻어있고 얼굴은 온통 퉁퉁부어서 눈도 쌍꺼풀이 풀릴 지경인데 내가 울면서

살아나와줘서 고맙다고 손을 꼭 잡으니까 아이엄마의 이름인 누구엄마가 아니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목을 끌어안고 사랑한다란 말을 하는데 두 눈도 제대로 못 뜬 남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고 내 볼에서도 감사의 두 줄기 눈물이 흘러 우리는 눈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미끈 뜨끈한 두 볼로 부비고 있었다.

간호사의 눈도 다른 보호자의 눈도 안중에 없는 눈물의 상봉이었다

과연 열달 배 아파서 피를 쏟으며 낳은 아들이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서운함이 일어난다.

또 한번의 섭섭함은 지금의 아버님 집을 지을 때에 우리가 농협에서 대출 받고 아버님이 수중에 있던 돈을 다 내 놓으셔도 땅 사고 건축하는데 부족해서 돈이 필요했을 때 전에 같은 동네사시던 아주머니가

우리 시어머니께서 시집 오시기 전에 모아 둔 돈이 제법 있는 걸로 안다며 좀 보태면 되지

왜 빌리기 까지 하냐고 안타깝다 하셨다.

그래도 쉽게 꺼낼수 없는 얘기라 차일피일 하다가 공사비를 줘야 해서 결국에는 얘기드렸더니 없다고 펄쩍 뛰셨다.

우리도 보지 않았고 그냥 말만 들은거라 미안 했는데 아버님께서도 시어머니의 뭉칫돈의

실체는 알고 계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내 놓으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의 돈은 아니라서

그냥 속을 끓이는데 시어머니는 어느 날 부산 동생한테 빌린 돈이라고 하시면서 천만원을

내 놓으셨다.

아버님은 동생 돈이라 해도 시어머니 돈 일거라시면서도 이자를 꼬박꼬박 물으셨다.

물론 원금도 우리가 다 갚아 드리고.

시누이는 지금도 첫아이 낳고 시어머니가 딸 산후조리하러 가시면서 맨손으로 덜렁오실 때

시누의 시어머니와 어색한 웃음으로 마주 했던게 챙피하고 이해가 안된다 한다.

그러면서도 며칠만에 내려 오실 때는 딸네 냉장고 열어서 생선이며 과일을 싸서 보따리 꾸리던 모습에 기절 할 뻔 했단다.

가져가겠다고 마음 낸 새엄마를 말릴 수도 없고 몸은 아프고 정말 싫었다고 거의 울면서

전화가 왔었다.

배 아파 낳은 내 딸이라면 과연.....

나는 낯선 옷을 시어머니 앞에서는 가능하면 안 입을려고 한다.

조금 낯이 설다 이쁘다 싶으면 \"나는 그런거 어디 파는지 모르겠더라.사 오면 돈 줄께

나도 사다 줘 봐라\".......

누가 감히 시어머니 사다 드리고 돈 주세요를 하겠는지.

맛있는 과일이나 귀한 음식이 생기면 차로 5분 거리에 계시는 아버님댁에 남편을 시켜

갖다 드리면 다음에는 \"맛있더라.고맙다.\"가 아니고 아예 그거 나도 좀 사 주라 그거 좋더라를 연발하는 바람에 어찌해야 좋을지.

그렇지만 나는시어머니가 나쁘다라고만 하지 않는다.

고생고생 하시면서 6남매를 이쁘게든 밉게든 키우셨고 아직도 아버님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시면서 수발을 들고 계셔서 고마울 뿐이다.

홀아비로 계셨더라면 고스란히 며느리들의 감당이었을 것을 시어머니는 잘 해 나가고

계시고 또 아들 흉도 마음 놓고 봐도 되고, 아버님 흉도 마음놓고 해도 걱정이 없다.

같이 흉도 보고 험담으로 수다를 떨어도 같이 즐기는 형국이니...

우리가 세째아들이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부산에서 이사 오실 때 묵은 살림은 다 버리고 오시라 하고 장롱이며 찬장 문갑 안방 가구 일체, 커텐, 심지어 신발장 세탁기까지 살림살이 전부를 신혼방처럼 꾸며 드린게 아직도 고맙다 하신다.

남편을 처음 볼 때 부터 다른 자식보다 더 알뜰살뜰 챙겨주신 새어머니께 무리가있었어도

그렇게 하는게 남편이 좋을거라 해서 하면서 손이 많이 오글린건 사실이다.

우리 아이들이 한창 클 때 였고 우리가 그 때는 집이 없었었고 사택에 있었는데 얼마간 모아 둔 돈에 빚까지 내면서 집에 가구까지 하기엔 벅 찼지만 지나면서 생각하니 참 잘 했다 싶다.

내내 친척들의 칭찬덩어리고 며느리 잘 들어와서 집안이 핀다고(?) 오래오래 울궈 먹는

곰국 같은 위력이 있다.ㅎㅎㅎㅎㅎ

그 뒤에 우리가 아이들에게나 다른 형제들에게 잘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남아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 재산이라면 재산이다.

아버님보다 단 며칠이라도 더 오래 사시는 시어머니였으면 좋겠다.

아버님보다 단 며칠이라도 오래 사시기를 희망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