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친정아버지의 기일이다.
아버지 나이 64세에 암을 셋씩이나 동무하셔서 이기지 못하고 완패.
잦은 소화불량을 경험하시다가 정밀검사를 받아 보자시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도 고집스레
반대하시다가 퍼질대로 퍼지고 상할대로 상한 다음에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 하시다가 얻으들은 병명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위암에 대장암에 폐암까지....
성한 내장이 거의 없다보니 대학병원에서도 수술을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드시고 싶은
음식 있다시면 뭐든 다 해 드리라며 퇴원할 것을 권했다.
그래도 아버지한테는 사실데로 다 말씀을 못 드리고 집에서 요양를 잘 하면 된다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 택시를 대절해서 대구 동산병원을 퇴원하던 날 아버지는 오히려
혈색이 좋으신 듯도 했다.
섭생만 잘하면 낫는다고 했으니 희망이 생기시는 듯 하셨다.
그 길이 마지막 길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시는 아버지는 한 겨울에 수박이 먹고 싶다 하셔서 부랴부랴 온 시장을 뒤져서 귀한 수박을 사다 드리면 한 쪽도 못 드시고 내 놓으시고
(23년 전만해도 비닐 하우스가 지금처럼 흔치 않아서 겨울 수박은 귀했다.)
쇠고기 육회가 잡숫고 싶다셔서 금방 잡은 한우 육회를 사 드려도 두세점도 못 드시고
접시를 밀어 내 놓으셨다.
누가 병문안을 와서 어느 병원이 잘한다더라 어느 한의원이 용하더라 말만 떨어지면
그 길로 택시를 불러 시외건 시내건 다 순회를 하시는 거였다.
본인한테는 사실을 알릴 수 없는 가족들은 빚까지 내면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리려
모든 정성을 다 했지만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이 아니고 심지마져 다 닳아버린 아버지의
생명의 등불은 더 이상 피워지지 않았다.
급기야 혈변이 시작되고 까무러치시며 화장실을 다니기 시작하시면서 아버지의 단말마적
신음소리가 집안을 휘감고 화장실에서 까무러치시고 의식이 순간순간 없어져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려 하셨다.
부축도 받지 않으시고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시면 미이라처럼 하얗게 탈색이 되어 나오시곤
하셔도 끝내 엄마의 수고를 마다 하셨다.
그때는 위로 두 오빠가 장남과 둘째 오빠는 한창 호황을 누렸던 중동 건설현장에 가고
없었는데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두 아들을 기다리시며 고개를 문쪽으로 향하시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오랜 병에 시달리시면서도 한번도 병원을 자발적으로 가지 못하시고 엄마의
강권에 이끌리시어 겨우 가시는 무능함을 보이셨다.
젊어서는 휴일에 동네 친구분의 부탁으로 휴일을 반납하시고 대타로 근무하시다가
한쪽 눈을 잃으시는 불운을 겪으셨다.
처음 안구가 튀어나와 급하게 응급처치를 마치자 엄마는 대구의 큰 병원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쓸데없이 아녀자가 큰일작은 일에 설쳐댄다며 대학병원행을 마다하시다가
세번의 눈 수술이 실패하면서 시신경이 썩어버리는 바람에 여영 한 쪽 눈을 잃어버리셨다.
그냥 시력이 없어진 채로 안구가 있는 상태가 아니고 아예 안구가 빠져 버린 함몰상태.
어릴 때는 아버지의 한쪽 눈이 무섭고 차갑게만 빛나는 한 쪽 눈이 두렵기까지 했다.
잃어버린 것은 아버지의 한 쪽 눈이 아니라 아버지의 청춘도 잃어버린 바 되어 버렸다.
알뜰한 엄마의 살림솜씨로 제법 많은 현금도 이자 쓰는 돈으로 빌려주고 있었고
토지도 꽤 되어서 가을 걷이도 제법 많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반쪽 세상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3년 전의 일이었고 그 때부터 아버지는
가정도 자식도 관심 밖의 일이었고 월급의 대부분을 술값으로 날리는 허송세월.
밤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골목을 휩쓸며 세상을 저주하고 병원을 원망하며 아버지는
담배로 폐를 구멍나게 하시고 술로 대장을 녹게 하시고 깡소주 드시고 안주 없는 대작이
위를 삭게 하셨다.
밤이면 특별히 하실 말씀도 없으시면서 우리 남매들을 주ㅡ욱 불러 앉혀 두시고 이름만
자꾸자꾸 불러 보시는 모습이 너무 싫었고 아버지 모르는 눈길로 마구 흘기기 까지 했었다.
고개를 떨구시고 술냄새 안주냄새 그기에다 섞은 트림냄새 까지 악취를 풍길 때면
아ㅡ우 정말 문을 열고 튀쳐 나가버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부재 아닌 부재로 키 작은 엄마의 고생은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부잣집 둘째 딸이 시집 오면서 요이부자리에 까지 지전을 넣고 꿰매어 올 정도로
엄마의 예단은 비상금 은행이었단다.
아버지의 군 기피로 만주까지 피난가는 고행길에서 비단금침도 고쟁이 속 지전 다발도
위로 두 오빠도 다 잃어버리고 종국에는 군에 가실 것을 고생고생 다 겪으시게 하시고
신혼 집도 날리고 맨 바닥에서 피눈물로 이룬 재산을 아버지는 그렇게 혼자서만의
밀폐된 세상에서 흩어버리고 우리 온 가족을 힘들게 했다.
엄마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5남매를 두고 철길로 몇번이나 뛰어들까 맘을 내고 철로 위에
올라섰다가도 멀리서 기차 들어 오는 소리가 선로를 따라 조금씩 발바닥에 전해져 오면
어린 남매의 까만 눈들이 어른거려 끝내는 선로를 내려 오시고야 말았다고 하셨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전 재산을 다 날려버린 살림살이는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몇천평되는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오빠가 토지사기꾼에게
날려버리는 불운까지 겹치면서 무너져 버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을 것 같던 시간의 맞물림 속에서 아버지는 막내인 딸이 운동도꽤 잘해서
도민 체육대회도 나가고 학교에서 크고 작은 상과 감투도 쓰고 다니는게 기특하고 고마우신지 아버지식의 사랑으로 하나 딸에게는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셨다.
퇴근 길에 종이봉지에 담아 오시던 왕눈깔사탕이나 파래 뭍힌 샘배이나 귀한 롤케잌....
오빠들은 구경도 어려웠던 군것질거리를 사 안고 오시면 내 이름을 부르시며 거친 뺨을
부비시며 그냥 말 없이 봉지만 가만히 내 미시며 혼자 먹어라 하셨다.
월급봉투도 없이 살았던 어린 날에 아버지의 선물은 완전히 특혜였었다.
특별히 말씀은 없으시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은둔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는 생각의 전환만 있었더라도 아마 10년이상은 더 사셨을 것이다.
\"이 놈의 세상, 이 죽일 놈의 세상, 확 깨져버려라! 확 엎어져 버려라!!!\"
아버지의 소리없는 분노는 자신을 갉아먹는 살인충이 되었고 결국에는 아버지를 정복했다.
살뜰한 부성도 알뜰한 지아비의 사랑도 한껏 펼치지 못하시고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다.
엄마의 눈물은 원망과 세월의 잔인한 사라짐에 대한 서러움과 끝내 회복하지 못했던 옛날의
부를 그리워하신 회한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래도 못해드리고 원망했던게 미안해서 많이 우셨다고 하셨다.
아버지를 산에 묻고 돌아오던 날에는 가을 비가 퍽 많이도 내렸다.
시끄러운 공동묘지도 싫으시다 문중묘지도 싫으시다 하셔서 외딴산에 아버지 홀로 뭍어드렸다.
그 뒤 18년이 지나고 그 산에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아버지 묘를 이장하라는통지를 받고
가족회의 결론은 화장.
그렇게해서 아버지의 흔적은 공중분해 되어버리고 말았다.
반쪽의 세상에서 원망과 자신을 향한 좌절과 절망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인생이 내게는
사는 방향을 잡아주었고 절대로 정말로 아버지처럼 무능한 남자랑은 살지 않겠다던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아버지는 딸의 소원을 미안해서 들어 주셨는지 남편은 결혼하고
단 하루도 일을 쉬며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아서 믿음직하다.
휴가 때는 가족을 위해서 몸도 마음도 다 봉사하는남편.
가족을 최 우선 챙기는 남편이 있기에 어린 날의 아픔은 그냥 전설인냥 아련하다.
영감쟁이.
오래오래라도 계셨더라면 미워도 다시 한번 찾아가서 용돈이라도 두둑히 드리고
손주손녀 재롱도 받으시련만.....
세월은 많은 아픔도 잊게 하고 원망도 데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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